성수대교 붕괴 사고 | 聖水大橋崩壞事故 | Sŏngsu Bridge Dis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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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사고 | 聖水大橋崩壞事故 | Sŏngsu Bridge Disaster

 


발생일
1994년 10월 21일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94-2 일대
성수대교 10, 11번 교각
유형
건물 붕괴 및 추락
원인
동아건설의 부실공사
서울특별시의 유지관리 미흡
인명피해
사망
32명
부상
17명
재산 피해
버스 1대, 승합차 1대, 승용차 4대 파손 및 침수

1994년 10월 21일 한강에 위치한 성수대교의 중간 부분이 갑자기 무너져내리며 현장을 지나던 시내버스와 차량들이 그대로 추락하면서 큰 인명피해를 낸 사건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와 함께 대한민국 3대 붕괴 사고로 불리며, 이미 연이은 사건사고로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김영삼 정권 시대의 굵직한 기록으로 남겨진 참사이다.

 


32명이라는 사망자 수만으로 본다면, 광복 이후의 인명참사 규모로 10위권 밖이다. 그러나 인명피해가 많은 사건들은 대부분 비행기가 추락한다거나, 고속도로 위에서 차량이 충돌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한 일이었던 반면, 이 사고는 수도 한복판에 있는 한강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충격을 가져왔다.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처럼 국민들의 뇌리에 남은 대형 사고다. 물론 그 이전인 1992년에도 창선교 붕괴 사고, 신행주대교 붕괴사고 등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가 없진 않았으나, 서울 한복판에서 한강의 주요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는 처음이었기에, 앞선 두 사고보다 훨씬 충격이 컸다. 결정적으로 앞서 언급한 두 사고는 인명피해도 성수대교 붕괴 사고에 비해 적었다.

1994년 10월 21일 금요일, 00시 20분 무렵과 02시 30분 무렵 1.3 x 2m 크기 철판이 성수대교 상판 이음새에 깔려 있음을 당시 운행하던 운전자들이 목격하였다. 상판 이음새 부분에 심하게 벌어진 틈새를 덮으려는 서울시의 땜질식 응급 조치였다. 하지만 균열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사고 당일 새벽 6시 무렵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차량의 운전자는 이음매를 지날 때 충격이 너무 커서 서울시에 직접 신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도 교량진입 통제 등 긴급조치를 취하지 않아, 결국 비극적인 대형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 성수대교의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가 붕괴되었다. 사고 부분을 달리던 서울지방경찰청 제3기동대 40중대 소속 서울7구 9286 하늘색 기아 베스타 승합차 1대와 서울2트 2652 검은색 기아 세피아, 서울3호 9749 검은색 기아 프라이드 승용차 각 1대는 현수 트러스 상판과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다. 또한 붕괴되는 지점에 걸쳐 있던 서울3르 4675 흰색 대우 르망, 서울4프 7962 쥐색 현대 엑셀 승용차 각 1대가 물 속으로 빠졌고, 르망 승용차 동승자였던 여성 김모 씨(여.37)와 여성 박모 씨(여.41)를 제외한 엑셀, 르망 운전자와 동승자 등 3명은 모두 사망했다. 1

이후에 서울대공원에서 번동 방향으로 가고 있던 한성운수 소속 서울5사 8909호 16번 시내버스는 버스 기사 유모 씨가 붕괴 지점을 발견하고 최대한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전륜은 붕괴지점 밖으로 밀려나가고 후륜이 붕괴 부분에 걸친 상태로 정지했고, 잠시 뒤 차체가 뒤집어지면서 추락했다. 추락 과정에서 사고 버스 창문에 달려 있던 창틀과 창살은 수면에 충돌하며 큰 충격을 받아 심하게 파손되며 버스 밖으로까지 날아갔다. 또한 몸이 뒤집혀진 채로 추락한 승객들은 충돌 순간 버스 천장에 머리 등을 크게 부딪히며 사망하였고, 심지어 일부는 사지가 처참하게 찢겨 나갈 정도였다. 때문에 구조 과정에서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승객의 시신과 피범벅이 된 유품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당시 기사 16번 버스를 운전하던 당시 사고 버스 기사 유 씨도 앉은 채로 목숨을 잃었다. 사고 버스의 바로 뒷 차의 운전기사였던 동료 최모 씨는 사고 당일 버스 안에서 동료의 죽음을 듣고 펑펑 울었고, 사고 이후에도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고 한다.관련 게시글

결국 버스 1대, 승합차 1대, 승용차 4대 등 모두 차량 6대 탑승자 49명이 추락했고, 이 중 32명(남성 19명, 여성 13명.)이 사망했다.사상자 대부분이 거꾸로 뒤집혀 추락한 16번 시내버스에서 발생하였고, 운전기사를 포함한 탑승자 31명 중 사망자가 29명이나 나왔다. 생존자였던 두 명은 각각 신원미상의 20대 남성, 43세 여성 권모 씨였는데, 두 명 모두 출입문 쪽 자리에 앉아있었다고 한다. 남성은 앞쪽 자리, 권씨는 뒤쪽 좌석이었다고 한다. 만약 거꾸로 뒤집혀서 추락하지 않았거나, 하다못해 안전벨트를 매는 고속버스였다면 중상자가 많이 나올지언정 상당수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인데, 상황이 불운했다. 또한 당시 즉각적인 대처가 이루어지지 못해, 사고 직후까지도 살아있던 일부 생존자들이 결국 사망하게 되기도 했다. 이외 사망자 3명은 승용차에서 발생했고, 침수되는 차량에서 탈출 하지 못해 익사하였다. 여기서 이 버스의 희생자들은 지금까지도 가장 불운하고 안타까운 사망 사례로 기록되었는데, 10초만 더 빨리 갔거나, 10초만 더 늦게 갔어도 이들은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침 사고 발생 시각이 아침 출근 및 등교시간이라 등교하던 학생들을 비롯해 출근하던 직장인과 교사 등 평범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그 버스를 타고 아침에 등교하던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과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이 이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이 참사로 여학생 9명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 무학여중고는 한동안 초상집 분위기였다. 강남 8학군에 진학 예정이었던 학생들이 많아서 더 심각했다. 이로 인해, 무학중학교와 무학여자고등학교는 사고가 발생한 지 20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도 추모일을 지정하여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현재 무학중, 고등학교 졸업생의 증언에 의하면, 추모기간은 있지만 행사 등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서울교육대학교 재학생이던 이승영(당시 20세) 씨는 교생 실습을 가느라 역시 16번 시내버스에 탑승했다가 그 사고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사후 장기기증을 원했던 고인의 뜻을 가족들이 지켜 주려고 했으나, 장기기증 시한인 사망 후 6시간을 넘기고서야 시신이 수습되었다. 결국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시신을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하는 것으로 대신해서 고인의 뜻을 기렸다. 고인의 모친은 보상금으로 교회를 통해 장학회를 운영하여 어려운 형편의 신학도들의 장학금 지급 및 강원도 전방 부대에 이동도서관 차량 기증 등의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1. 교량 최초 시공사인 동아건설의 책임 부분
유효단면적의 감소와 응력집중을 유발하게 한 용접시공의 결함과 제작오차 검사 미흡. 지어졌던 1970년대에는 파격적이었던 트러스 공법이 쓰였는데, 설계와 시공이 미흡했고, 유지보수도 부실했다. MBC가 사고 현장의 수중촬영을 하였는데, 트러스의 강도만큼 중요한 볼트가 손으로 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했고, 볼트의 구멍도 제멋대로 뚫려 있었다.

2. 교량 보수 및 관리기관인 서울특별시의 책임 부분
피로균열의 진전을 예방하지 못한 점검 및 유지관리 미비
급속도로 증가하는 차량 통행량에 대비하지 못함. 하루 통행량을 8만 대 정도로 설계했지만, 실제 하루 통행량은 2배가 넘는 16만 대 이상이었다. 게다가 붕괴 전해인 1993년에 동부간선도로의 강북구 구간(성수~상계) 구간이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폭증했는데, 당시 서울시는 하중제한만 낮추는 형태로 대처하였고, 그나마도 제대로 단속하지 않았다. 특히 당시에는 청담대교가 건설되기 전인 데다, 성수대교 북단은 당시 일차 개통된 강변북로와 연결되지 않고, 용비교와 연결되는 (현재의) 뚝섬로에 설치되어 근교 교량 분산이 쉽지 않아, 경부간선도로 입구 분기점에서 가장 가까운 언주로와 성수대교로 교통량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시 성수대교는 왕복 4차로에 불과했기에, 상습적인 교통체증이 심하여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교통량 문제로 노후화 논란이 가장 크게 일어나는 게 현재의 성산대교이다.
피로균열을 가속화시키는 규정 이상 중량차량 통행 규제 소홀. 일반적인 대형트럭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인 18톤 하중으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성수대교 북단에는 바로 삼표산업 레미콘공장이 있었다. 대당 중량이 최대 25톤에 이르는 레미콘 믹서트럭들이 아무런 규제 없이 통행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차량총중량(40톤 이하)과 축중량(10톤 이하)만 규정돼 있을 뿐 그에 따르는 추가 규제가 없기 때문이다. 차량총중량에 최원축간거리(맨 앞바퀴와 맨 뒷바퀴 사이의 거리)의 제한이 없고, 축중량에 인접축간거리의 제한이 없다.

3. 건설업계의 능력 부족
성수대교는 경간 중앙부에 (문의 경첩과 같은) 힌지를 넣는 게르버보 형식으로 건설되었다. 구조계산이 쉬워 당시에 많이 사용했던 구조형식이다.

구조계산에 필요한 수치 중 '부정정차수'라는 것이 있다. 부정정차수가 높아질수록 구조해석을 하는 데 필요한 계산량이 껑충껑충 뛰어오른다.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발달해서 구조해석이 쉽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금만 부정정차수가 높으면 슈퍼컴퓨터를 이용하더라도 해석에 걸리는 시간은 갑절로 늘어났다. 그런데 구조계에 힌지를 넣으면 부정정차수를 한 단계 낮출 수 있고, 게르보 형식은 부정정차수가 0인 정정구조물이다.

정정구조물은 구조적으로는 안전하고 구조계산 방식이 간단해서 펜과 계산기만으로도 빠르게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부재(Member)가 하나라도 파괴되면, 구조물 전체가 붕괴되는 위험을 내포한다. 직관적으로도 교량 중간에 힌지를 넣으면 위험함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성수대교이다.

사고 당일, 이영덕 국무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으나,1994년 10월 24일에 공식적으로 반려되었던 적이 있었다. 오후 7시에 참사의 책임을 물어 이원종 서울특별시장이 문책성 경질되었다. 참으로 얄궂게도 이원종이 서울시장으로 발탁된 것은 그가 충청북도지사 시절인 1993년 1월에 발생한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를 잘 수습한 솜씨가 높이 평가받은 덕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 사고 당시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내무부에서 경고를 받기는 했다. 

경질된 이원종 시장을 대신해서 당시 경상북도지사였던 우명규 지사가 서울특별시 시장으로 긴급임명되었다. 그러나 우명규 신임 시장이 성수대교 건설 당시 서울시 책임자(서울특별시 건설본부장)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11일 만에 자진사퇴했다. 사고 당시 시기가 지방자치제 부활 이전이어서 지역민들의 선거로 뽑는 민선체제가 아닌 정부에서 임명하는 관선체제로 지방정부의 장이 선발되었기 때문에 이처럼 발빠른 인사이동을 할 수 있었다. 결국 다음달 3일 여당 전국구 의원 최병렬이 새로 부임했다. 최병렬은 서울의 마지막 관선시장이었다. 성수대교 붕괴참사를 계기로 부실시공을 막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나름대로 의지를 가지고 일했지만, 임기 종료 하루를 앞둔 1995년 6월 29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민선으로 당선된 조순 신임 시장의 취임이 7월 1일이었기 때문에 경질이야 되지는 않았지만, 최병렬 역시 서울시장으로서 대형참사의 책임을 안고 불명예스럽게 이임했다.

통행량이 많은 서울 지역에 주요 한강 교량이 끊겨서 교통체증도 심각해지리라 예상했다. 서울시에서는 군 당국과 협의하여 군사작전용 부교 설치까지도 검토했다. 그러나 부교가 일반차량 통행용이 아닌 군사작전용이기 때문에 훈련된 병력이 아니면 교량 통행에서 안전 문제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부교가 왕복 4차선인 성수대교의 절반 규격이었기 때문에 설치효과도 미비할 터였으며, 군사작전이나 보안상 문제가 될 소지도 있기에 결국 철회되었다. 다행히도 시민들이 우회도로를 사용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했기 때문에 통행량이 잘 분산되어 생각보다 큰 체증이나 문제점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고 직후, 서울특별시는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정리 및 수습이 완료되는 대로 3개월 안에 성수대교의 붕괴부분을 재시공하고 완벽히 보수하여 재개통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시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은 후 철회했다.

동아건설은 사고 직후 성수대교 시공 후 5년간 하자보수를 성실히 해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발뺌했지만, 여론의 뭇매를 맞고 결국 사과광고를 일간지에 게재했다. 수습이 마무리되면 1,500억 원을 들여 전면 재건설하고 한강교량의 전면 보수 및 관리를 위해 100억 원을 서울시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된 여론에 다시 한 번 뭇매를 맞았다.

결국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해 성수대교를 새로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995년 4월 26일부터 현대건설이 새로 건설하기 시작해, 1997년 7월 3일에 완공되어 차량통행이 재개되었다. 해외 감리업체인 High Point Rendel 社가 대한민국 최초로 해외 감리업체 자격으로 시공 감리에 참여하여, 한국 감리회사와 공동으로 시공감리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 부실시공이 한국 감리사와 시공사의 담합이나 뇌물수수 등 비리에서도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가양대교 시공 때에는 아예 해외 감리업체가 단독으로 감리업무를 담당했을 정도로 정부가 국내 감리업체를 심각하게 불신했다. 한국 감리업계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고 발생 7년 후 대법원은 본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 동아건설의 부실시공 때문이라고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동아그룹 자체도 2001년을 끝으로 완전히 해체되면서 동아건설도 프라임개발을 거쳐 SM그룹 계열이 되었다.

1999년에 피해자 한 명의 유가족이 성수대교 북단의 위령비 근처에서 목숨을 스스로 끊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후술할 조관우의 실락원 MV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유가족 자살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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