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淸海鎭海運 歲月號 沈沒 事故 Sinking of MV Sew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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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
발생일로부터 +3653일, 10주년
발생 위치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동거차도리 인근 해상
(북위 34°13'5.16"동경 125°57'00")
출발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경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도착 예정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경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
유형
침몰
원인
확증 불가
탑승 인원
476명
인명 피해
사망
299명
실종
5명
구조
172명
재산 피해
약 6,000억 원 이상
동원
인원
약 700여 명으로 추정
장비
수상 오토바이, 제트보트, 헬기, 민간 어선

세월호 침몰 사고(영어: Sinking of MV Sewol, 歲月號沈沒事故)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경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되어 침몰한 사고이다. 4·16 세월호 참사(April 16th Sewol-Ferry sinking accident, 四一六歲月號慘事) 혹은 세월호 참사(歲月號慘事)로도 불린다.

세월호는 청해진해운 소속의 인천발 제주행 연안 여객선이다. 단체 수학여행을 떠나는 안산시 단원고의 교사와 학생 339명을 포함한 승객 476명을 태우고 운행하던 중 4월 16일 오전 8시 58분, 병풍도 동북쪽 2km(1.7해리) 인근에서 조난 신호를 보냈다. 2014년 4월 18일 세월호는 완전히 침몰하였으며, 이 사고로 시신 미수습자 5명을 포함한 304명이 사망하였다. 침몰 사고 생존자 172명 중 절반 이상은 해양경찰보다 약 40분 늦게 도착한 어선 등 민간 선박에 의해 구조되었다.

3년 동안 선체 인양을 미뤄오다가 2017년 3월 10일 제18대 대통령 박근혜가 파면되고 12일 후인 2017년 3월 22일부터 인양을 시작했다. 2017년 3월 28일 국회에서 세월호 선체조사위원선출안이 의결되었다.

청해진해운
인천시 중구에 본사를 둔 청해진해운은 1999년 2월에 창립된 연안여객선사이며, 4척의 여객선으로 인천-제주, 인천-백령도, 여수-거문도의 3개 항로를 운항하였다. 2003년에는 마루에이 페리에서 대형 카페리 오하마나호를 들여와 운용하였고, 2012년 10월에 세월호를 들여왔다.

청해진해운은 나미노우에호를 들여온 직후인 2012년 10월 7일부터 이듬해 2월 16일까지 전남 영암에 있는 CC조선에서 이 선박의 증개축 작업을 벌였다. 승객이 머무는 여객실을 증설해 최대 승선 인원은 956명(여객 921명, 선원 35명)이 됐다. 이런 개조 작업으로 아무것도 싣지 않은 배 자체의 무게를 뜻하는 경하중량은 307톤 증가했고, 이에 따라 선박이 적재할 수 있는 최대 중량을 의미하는 재화중량은 307톤 감소했다.

세월호가 구명정이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기울어지며 침몰한 원인 중 하나가 무리한 불법 개조·증축 때문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있지만, 선박 설비 안전 검사 기관인 한국선급에 세월호의 증축 등에 대하여 허가 받았고 2차례에 걸쳐 문제가 없다고 평가하여 위법성은 없었다고 한다.

2009년 대한민국 해운법 시행규칙이 개정되며 여객선 운용 시한이 진수일로부터 20년에서 30년으로 늘어났고, 청해진해운은 일본에서는 운용시한 약 18년이 된 세월호(1994년 건조)를 사들여와 선령 20년의 오하마나호(1989년 건조)와 함께 운항할 수 있었다. 당시 국토해양부는 "여객선의 선령(船齡) 제한을 완화하면 기업 비용이 연간 200억원 절감될 것"이라며 규제완화에 대하여 논평했다.

이후, 청해진해운은 2012년 10월 세월호를 담보로 산업은행에서 개보수 자금 30억원 등 100억원의 차임급을 받았다. 이중 상당한 돈이 세월호 증축에 사용되었다.

청해진해운은 세월호의 출항 전 운항관리자에게 차량 150대, 화물 675톤을 실었다고 보고했으나, 사고 이후에 차량 180대, 화물 1157톤이 실린 것으로 밝혀졌다.

인천~제주 항로를 운항해 온 청해진해운은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한 세월호 사고의 책임을 물어 2014년 5월 인천~제주 운항 면허가 취소되었다.

선원
대한민국의 내항선 선박직(선장·항해사·조타수·기관사 등) 대부분은 1년 이하 계약직으로 일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사고 당시 세월호 선장도 월 270만원의 1년 계약직이었다. 이에 직업적 안정성이 떨어지니 소속감이나 사명감을 기대하기가 애초에 어렵다는 지적을 받았고, 실제 선원에 대한 교육 관리도 열악하였다. 청해진 해운은 2013년 선원 교육비용으로 54만 1천원을 썼다.

세월호

2014년 3월 27일에 촬영된 세월호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세월호입니다.
세월호는 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의 하야시카네 조선(林兼造船)[내용주 1]에서 건조한 여객·화물 겸용선(RoPax, RORO선)이다. 일본 마루에이 페리 사에서 '페리 나미노우에'(フェリーなみのうえ)라는 이름으로[내용주 2] 18년 이상 가고시마~오키나와 나하 간을 운항하다가 2012년 9월 퇴역하였으며 청해진해운이 2012년 10월에 중고로 도입하여 선미쪽에 증축·개조 작업을 거친 후 2013년 3월부터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하였다. 세월호의 이름에 대해 일부 언론은 "세상(世)을 초월(越)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보도했으나 사실은 '흘러가는 시간'을 뜻하는 세월(歲月)이다.

세월호는 총 배수량 6,835톤에 전장 145m, 선폭 22m이고, 21노트의 속도로 최대 264 마일을 운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객 정원 921명에 차량 220대를 실을 수 있으며, 적재 한도는 3,794톤으로 되어 있다.

세월호의 내부는 5층으로, 갑판 아래에 위치한 1층과 2층에는 화물칸, 갑판 위의 3층과 4층에는 승객을 위한 객실이 마련되어 있고, 5층에는 조타실과 승무원실, VIP실이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인천-제주 항로
인천-제주 항로는 1995년 5월에 처음으로 개설되었다. 인천~제주 항로를 처음으로 운항한 것은 청해진해운의 전신격인 ㈜세모의 '세모고속페리'호였다. 세모고속페리호는 최대 500명의 승객과 차량 100여 대를 싣고 편도 16시간으로 인천항과 제주항 사이를 주 3회 왕복하였다. 2001년에는 청해진 해운이 춘양호를 추가로 투입하여 세모 고속페리 1호와 함께 최대 600여 명의 승객을 싣고 편도 13시간으로 1일 1회 운행하였다. 2003년 3월에는 6,322톤급의 대형 카페리 오하마나호가, 2013년 2월에는 6,852톤급의 세월호가 두 선박을 대체하였다.

인천~제주 항로는 세월호 침몰 사고 직후 휴항되었으며, 2014년 5월 청해진 해운의 인천~제주 항로 면허 취소로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이후 2021년 12월 여객선사 하이덱스 스토리지가 비욘드 트러스트호를 취항하여 운항해 왔으나 현재는 또 다시 중단되었다.

사고 해역
사고가 발생한 해역은 맹골수도가 위치한 곳으로,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이다. 이 곳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울돌목 다음으로 조류가 세다(최대 6노트). 섬 주변에는 암초가 많지만 항로로 이용되는 수로 자체는 깊이 30m 이상으로 암초 등 항해 장애물이 없다.

사고는 2014년 4월 16일 오전에 전라남도 진도군 병풍도 부근에서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탑승자 476명(잠정) 중 172명이 구조되고 304명이 사망·실종되었다. 그리하여 이 사고의 생존율은 36.1%로 매우 저조하다.

사고 발생 전날 (2014년 4월 15일)
안개 때문에 출발이 2시간 30분 지연되는 바람에 원래 승선예정 배인 세월호의 쌍둥이선 오하마나호를 타지못하고 세월호를 타게 되었다. 세월호는 원래 예정보다 무게가 더 무거워져 상태가 안 좋았었다고 한다. 세월호는 오후 9시에 476명(잠정)의 인원과 짐을 싣고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세월호에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 교사 14명, 일반인 104명, 선원 33명이 탑승하였다고 알려졌다. 세월호에는 차량 180대, 화물 1157톤이 실렸음이 사고 후에 밝혀졌는데, 이로부터 인천항을 출발할 당시의 차량과 화물, 승객의 체중을 모두 더하면 적재 한도를 초과하는 것으로 계산되기도 한다.
사고 발생일 (4월 16일)
선박자동식별장치의 항적 자료와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세월호는 오전 8시 30분경 맹골도와 서거차도 사이를 최고 속도로 진입하였고, 항로를 바꾼 후 지그재그로 운행하다가 8시 49분경에 병풍도 부근에서 다시 급격히 항로를 바꾸어 급선회하였다. 항로는 'J'자를 그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오전 8시 52분 32초 (KST),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최초로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최초 신고자인 학생이 던진 첫마디는 "살려주세요"였고, 이후 그는 배가 침몰하고 있음을 알렸다. 당시 신고전화를 받은 전남소방본부 관계자는 내용을 듣고 목포해경을 연결했다 (54분 07초). 그런데 목포는 최초 신고자에게 제일 먼저 경도와 위도를 말하라며, 배의 위치를 물었다. 당황한 최초 신고자가 '네?'를 연발하자 119관계자는 그가 탑승객임을 알렸다. 하지만 해경은 반복해서 GPS를 거론하는 등, 위치를 물었다. 그로부터 1분 30초 뒤 해경 측은 선박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고, 최초 신고자는 "세월호"라고 답하였다(이러한 시간 지연에 대하여, 후일 박진수 한국해양대 항해학부 교수는 선박 이름부터 묻는 것은 기본임을 지적하고 "구조를 하려면 순서를 누가, 어디서,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우리는 육하원칙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비판했다). 세월호는 최초 신고보다 3분 후, 사고 해역과 가까운 진도관제센터(VTS)가 아닌 제주관제센터(VTS)에 교신하여 배가 침몰 중임을 알렸다(8시 55분). 그리고 다시 이 제주관제센터(VTS)는 목포해경이 아닌 제주해경에 연락하였고(8시 56분), 8시 58분에 비로소 목포해경이 사고를 접수하였다(이 사고접수도 세월호 승무원들이 아닌 학생의 신고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추후 상황을 파악한 진도관제센터(VTS)가 9시 6분에 세월호와 교신하여, 세월호를 호출하여 직접관제를 시작하였다. 9시 17분의 진도관제센터와의 교신에서 세월호 선원은 배가 50도 이상 기울어져 있다고 보고하였다.

항해 경로 Position on chart
진도관제센터와 교신 내용에 따르면, 9시 7분에 2,755톤급의 유조선 둘라에이스호가 진도관제센터와 교신 후 세월호를 육안으로 확인하였다. 둘라에이스호는 세월호를 구조하기 위하여 접근하였고, 9시 29분에는 세월호 구조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둘라에이스를 확인하였다. 세월호는 좌현에 대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둘라에이스호는 밀물 때여서 계속 밀리고 있었다고 응답하였다.
사고 접수 후, 해양경찰은 출동 및 구조에 나섰다. 9시25분 서해해경청 소속 헬기 511호와 해경 123정이 잇따라 도착했다. 하지만 출동한 해경은 세월호와 교신조차 하지 않았다. 승객들에게 퇴선 명령도 하지 않았다. 123정은 10시13분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을 태운 채 현장을 떠났다.
해경은 헬기 1대와 경비정 20척을 현장에 투입하여 헬기로 승객 6명을 구조하였고, 100여 명은 경비정에 옮겨 태워 인근의 진도 나 목포시 등지로 이송하였다. 대한민국 해군도 구조작업을 위해 사고 해역으로 유도탄고속함 1척과 고속정 6척, 해상초계가 가능한 링스헬기 1대 등을 투입했다. 민간 어선 선장 박영섭(56)은 16일 새벽 조업을 마치고 귀항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 선장은 오전 9시 3분경 수협목포어업통신국이 송신한 긴급 구조 요청 신호를 받고, 병풍도 북쪽 1.5마일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 바로 뱃머리를 병풍도 쪽으로 돌렸다. 오전 10시 30분경 사고 현장에 도착한 박 선장은 해경과 구조작업에 참여해 승객 27명을 구조하였다. 조도면 청년회원 김형오(47) 역시, 이장단장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자신의 1.1t급 소형어선을 몰고 구조작업에 동참하여, 총 25명을 구조하였다. 그 외에도 메시지를 받고 10여분 만에 출항준비를 마친 조도면의 어선이 60여척, 어민은 150여명에 달했으며 전속력으로 도착까지 20여분이 소요되었다고 전해져 초동구조에 민간 어선들이 큰 역할을 하였음이 밝혀졌다. 오전 9시 19분부터 YTN을 시작으로 각 언론에서 세월호의 침몰 소식을 긴급 타진하기 시작했고, 오전 10시부터 정부는 여객선 침몰 사고에 대응하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구성하여 가동에 들어갔다.
사고 당일 구조된 세월호 탑승자는 승무원 23명, 단원고생 75명, 교사 3명, 일반인 71명으로 모두 172명이었다.

수색 작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색 작업 종료를 발표한 2014년 11월 11일까지 총 209일간 계속되었다. 바다 밑 수색은 거센 조류와 탁한 시야, 낮은 수온으로 작업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작업 일정이 길어지면서 피로의 누적과 그에 따른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수습 방법
해상 및 공중
16일 사고 발생 초기에는 침몰된 세월호 부근에서 선박을 통한 해상구조와 헬기를 통한 공중 수색구조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초동구조에 민간 어선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잠수요원
잠수요원들은 우선 수면에서 선체까지 가이드라인(유도선)을 연결한다. 이 선은 빠른 유속과 가시거리가 10~20cm에 불과한 사고 현장에서 잠수요원들이 안전하게 선체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길이다. 물속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선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손으로 짚어가며 움직여야 한다. 또한, 빠른 유속 때문에 유도선을 연결하더라도 선끼리 꼬일 수 있고(꼬이면 다시 설치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잠수요원의 마스크까지 벗겨질 수 있다. 꼬인 선을 정리해가며 선체로 진입이 가능한 선실과 화물칸 입구, 조타실 등에 도달한다. 그리고 선을 그곳에 매어 놓으면, 그때부터 선체진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진입 입구를 확보하고, 다시 자신의 몸의 생명줄을 이은 뒤 선체 내부로 진입을 시도한다. 선체 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이므로 방향을 잃게 되면 선체 내에 고립되어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선체로 진입 후에는 휴대 조명 장비로 매우 혼란스러운 선체 내부를 일일이 눈으로 수색해야 한다. 그러나 수심에서의 작업시간은 최대 30분에 불과하여, 잠수요원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 따라서 고도로 훈련된 일부 잠수요원만이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또, 잠수요원들이 산소를 공급받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산소통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는 스쿠버 다이빙 방식이며, 둘은 공기호스가 연결된 다이빙 헬멧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는 머구리 방식이다.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16일 대한민국 정부는 머구리 방식은 탁 트인 수중에서 수중 작업을 위한 용도이며, 세월호의 선체를 굽이굽이 들어가서 작업하려면 생명선이 꼬이거나 절단될 위험이 있다며 스쿠버 다이빙 방식을 고수하려 했다. 스쿠버 다이빙 방식은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만 작업할 수 있다. 수심 30 미터에서 수면으로 올라오는데, 잠수병의 문제로 천천히 부상해야 하기 때문에 소요되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급부상을 브라보라고 하는데, 이 경우 잠수병으로 사망할 수 있다. 실종자 가족들은 지속해서 머구리 방식을 주장했다. 머구리 방식은 그만큼 잠수병 확률도 높지만, 머구리들이 다이빙 헬멧을 쓰고 서해 40미터 해저 바닥을 3시간 동안이나 걸어다니면서 키조개를 캘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업 한계는 20~30분이 아닌 3시간이다. 결국, 정부는 투입에 반대하다가 투입을 허가했는데, 머구리들이 투입후 선체 내부 진입에 최초 성공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내기 시작해 22일부터 세월호 침몰 사고의 구조방식이 머구리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범정부사고대책본부는 7월 11일 예정된 미국 수중재호흡기 잠수팀의 검증잠수가 작업현장 조건에 대한 이견으로 실시하지 못하고 미국 잠수팀이 철수하기로 했다고 다음날인 12일에 밝혔다. 수중재호흡기(Rebreather) 잠수는 잠수사가 내쉰 공기를 배출하지 않고 정화해 재활용, 잠수시간을 최대 6시간까지 늘리는 잠수방식으로 대책본부는 검증작업을 거친 후 세월호 수색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사고해역 검증 잠수현장에서 미국 잠수팀이 갑자기 "침몰지점 해상에 정박한 바지 탓에 잠수사 안전확보에 어려움이 있다"며 "바지가 없는 상태에서만 잠수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에 사고대책본부는 "'나이트록스' 잠수방식을 주력 잠수수단으로 활용하고 수중재호흡기 잠수를 보조 수단으로 병행할 예정인 현 상황에서 바지를 철수해 달라는 미국 잠수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수중재호흡기 투입이 무산됐다"고 밝혔다.

나이트록스는 잠수를 오래 할 수 있도록 산소 농도를 높인 기체를 말하며, 이 기체를 쓰는 잠수 방식이 나이트록스 잠수다. 잠수사들이 들이마시는 기체만 달라진 거라서 외관상 달라 보이는 건 없다. 하지만 기존의 '표면 공기 공급 방식'이 산소 농도가 21%인 일반 공기를 썼던 반면, 나이트록스 잠수사들은 산소 농도가 28%까지 올라간 기체를 공급받는다. 이 기체를 마시면서 잠수하기 때문에 기존의 2배인 최대 60분까지 잠수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수색 시간이 2배 가까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정밀 수색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구조당국은 자칫 나이트록스 방식을 잘못 쓰게 되면 산소 중독으로 인한 잠수병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도입 시기를 늦춰 왔었다.

공기주입 및 리프트백 설치
공기주입은 선체 내에 공기호스를 주입하여, 혹시 모를 선내 생존자들의 생존시간을 늘리는 역할과 부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물체가 물 위에 뜨기 위해서는 중력에 상응하는 부력이 작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기는 부력을 증가시켜줄 수 있다. 따라서 일종의 부력주머니인 리프트백과 공기주입을 정부는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알파잠수기술공사 이종인 대표는 이해가 잘 안된다고 논평했다. 공기주입은 사람이 있을 만한 곳에 해야 함에도, 제일 상갑판인 조타실에 공기주입을 했다는 주장이다. 또한, 조타실의 구조적 특성을 근거로 공기가 주입되어 다른 쪽으로 공기가 퍼져 에어포켓을 형성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했다. 그는 오히려 공기주입은 일단 조사 후, 식당 등 사람이 살아 있을 확률이 있는 곳에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18일 진행된 정부의 리프트백 설치 양상이 단지 배가 거기 있다고 표시하는 어떤 풍선처럼 돼 있을 뿐, 어떤 부력을 작용하는 효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선체 절단
5월 10일 범정부사고대책본부에 따르면 붕괴 위험이 확인된 곳은 5층 선수 승무원 객실 통로와 중앙 특실 통로, 4층 선수 좌현 8인실 통로와 선미 30인실 통로 등 4곳이다. 이런 상황으로 잠수 수색이 불가능한 구역이 생기자 선체 외판 일부를 절단하는 방안에 최종 합의했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의 법률대리인인 배의철 변호사는 27일 오후 진도군청에서 브리핑을 열고 "가족들은 애초 실종자 유실 위험 때문에 주저했으나 정부가 선체 부근과 외곽에 3차에 걸쳐 유실 방지를 위한 에어백과 그물, 안강망 등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해 한 명의 유실도 없이 시행될 것임을 믿는다"고 말했다. 절단은 4층 선미 우현부터 우선 추진하며, 절단 방법은 1차적으로 산소 아크 절단법을 사용하고 2차 대안으로 초고온 절단봉이 제시됐다. 범정부사고대책본부는 30일 오전 진도군청에서 열린 정례 브리핑에서 "전날 오후 2시 10분께 4층 선미 창문 3곳의 절단 작업을 시작, 현재 창문 하단 가로 4.8m를 절개했다"고 밝혔다. 또한 이날 오후 2시께 예정된 '수색구조지원 장비기술 연구 전담반(TF)'회의에서는 4층 선미 절단 진행 상황 점검과 전날 오후 가족들이 건의한 4층 선수 구역 절단 여부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2017년,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인양되었을 때 사진
선박 인양
수습 변수
조류 및 가시거리
선박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한 방법은 잠수요원 투입이었다. 잠수요원은 선박인근 및 선박내부를 수색했다. 그러나 맹골수도의 특성상 조류가 빠르고, 가시거리가 10~20cm밖에 되지 않아 잠수요원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어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기상
기상 역시 사고 수습을 더디게 했다. 심지어 17일 오후에는 기상상황이 나빠져 구조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저체온증
박준범 순천향대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10도~15도 사이의 물에 사람이 한두 시간 정도 있게 되면 이미 의식을 잃어요. 체온이 떨어지면서. 한두 시간이 지난다면 굉장히 위험한 상태에 빠진다고 할 수 있고요"라고 언급하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심장기능에 이상이 생기면서 맥박이 느려지는 서맥과 심방 및 심실세동, 심하면 심장정지까지 올 수 있다. 체온이 떨어지면 인체는 근육을 통해 열을 내 온도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근육양이 낮은 고령자나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은 특히 위험할 수 있다. 저체온증상태가 되면 구조과정에서도 작은 충격으로 심한 부정맥이 오거나 출혈이 생기기 쉬워 주의를 요한다.

에어포켓
사고 초기 일부 전문가들이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것으로 지적했던 것은 에어포켓이다. 정창두 서울대 조선해양공학 명예교수는 배가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떠있는 이유를 "컵을 물속에 엎어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았고, 다행히 선수 부분은 손상이 없기 때문에 공기가 갇혀 있는 거죠. 소위 에어포켓이 형성되어 있습니다"라고 설명하였다. 이 에어포켓에 공기가 8m3가량 있다고 가정하면, 마지노선은 최대 72시간으로 계산된다. 한편, 가라앉지 않은 부분에 의해 추산되는 선내 공기량은 500~1000 세제곱미터였다. 대서양에서는 선박전복 사고 후, 선원이 에어포켓에서 60시간을 버티다가 구조된 사례가 있었기에, 에어포켓에 의한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많았다. 정부는 에어포켓에 희망을 걸고 세월호에 공기를 주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에어포켓에 의한 생존자가 나오지 않았고, 에어포켓 관련 보도와 정부의 대응이 결과론적으로는 유가족들에게 '희망고문'이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격실
격실이란 사고의 파급을 방지하기 위해 격리시켜 만든 공간으로 대부분의 선박은 이 격실들을 갖추고 있다. 한국해양대학교 공길영 교수는 “지금 상황은 천안함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며 “실종자들이 생존해 있으려면 수밀격실이 돼야 하는데 배에 전원 공급이 중단되고 급격히 뒤집히는 대 혼돈 속에서 문을 닫는 조치가 취해져 있을지 비관적이다"고 말했다. 격실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문을 닫는 조치가 취해져야 하며, 격실에 에어포켓이 있다면 이론적으로 48시간을 버틸 수 있다.

1·2차 수색 관련
사고 발생 3개월이 다 돼가도록 정부가 주먹구구식 수색 계획을 내놓고 있어 실종자 가족들의 불신을 샀다.

실종자 가족의 법률 대리인인 배의철 변호사는 6월 30일 오후 진도군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이날 오전 실종자 가족들을 대상으로 정밀 수색 및 7월 수색 계획 설명회가 예정됐으나 계획이 미흡하고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지 않아 취소됐다"고 밝혔다. 이어 세부 수색 계획이나 잠수 시간을 늘리기 위한 방안이 전혀 없는 부실한 발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설명회를 중단하고 수색 계획 재수립을 요구했으며, "실종자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객실이 어디인지, 무슨 근거로 추정하는지도 없고 2층 화물칸 진입 통로 수색 여부, 잠수시간을 늘리기 위한 방안 등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또한 잠수사 교대 투입, 휴식 보장을 위한 인력 확충이 필요한 상황인데도 현재 이에 대한 논의조차 진행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가족들은 리브리더(수중재호흡기) 등 시속 1.8노트 이상의 유속에서도 장시간 잠수가 가능한 새로운 잠수기법과 30m 수심에서 25분, 40m 수심에서 10분 정도인 현행 잠수시간을 늘릴 수 있는 방안 도입이나 장마 등 기상 여건 대비책 등 가족 및 수색구조 TF 전문가들이 검토를 요청한 사안들이 빠져 있었다며 보완을 요구했다.

한편 대책본부 측은 이에 대해 "실종자 잔류 추정 구역은 예약 현황,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선정한 것"이라며 "해당 구역을 수색했음에도 찾지 못한 실종자의 경우 정확한 위치 추정이 어렵다"고 해명, 당장 개선안을 내놓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어 "2층 화물칸은 실종자 잔류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보고 있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차량과 화물로 인해 잠수사 투입을 통한 수색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가족들은 이날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으로부터 수색평가자문위원회 구성을 위한 전문가 명단을 전달받았으며 이 중 5명 내외를 선정해 자문 활동을 요청할 계획이다.

구조팀은 지난 6월 6일부터 1차 정밀 수색을 진행하고 6월 20일을 1차 수색 종료 시점으로 발표했으나 두 차례 연기하였고, 6월 30일에 수색과 관련한 설명회를 열기로 했으나 실종자 가족들의 반대로 취소됐다.

지원 헬기 추락 사고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광주광역시 소방헬기 추락 사고입니다.
2014년 7월 14일부터 세월호 사고 해역에서 실종자 수색 작업을 지원하고 2014년 7월 17일에 춘천으로 복귀하던 강원도 특수구조단 소속 헬기가 추락해 탑승자 5명이 모두 순직하였다.

침몰 원인 조사
사고 원인에 대하여 검찰은 2014년 10월 6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첫째, 12년 일본에서 수입된 후 수리 증축에 따라 총톤수가 증가(239톤) 하고 좌우가 불균형하게 되었으며, 둘째, 사고 당일 최대 화물 적재량(1,077톤)의 2배에 달하는 과적(2,142톤)이 있었고, 셋째, 선체 복원에 필요한 평형수 등을 1,375.8톤 감축 적재하였으며 넷째, 관계 법규에 의하지 않는 방법으로 차량 컨테이너를 부실 고박하는 가운데, 다섯째, 사고 해역 통과 시 조타할 의무가 있는 선장이 선실을 이탈하고 근무 항해사와 조타수가 과도하게 변침하는 등 운항상 과실이 더하여 침몰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했던 검찰의 발표는 다음과 같이 기각되었다. 첫째, 세월호의 증개축은 한국선급에 의해 허가를 받고 진행된 사항이며, 이로 인해 증개축의 위법성은 재판을 통해 인정되지 않았다. 둘째, 과적은 만재흘수선이 기준이므로 법적으로 과적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검경 합수부 자문단 보고서에도 운항상 과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셋째, 평형수는 원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운항 상황에 따라 조절 가능한 것이며, 넷째, 선원 재판 1심에서는 이준석 선장이 조타실에 재선하여 직접 지휘를 할 의무가 없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범죄사실에서 제외되었다.

가설들
다음은 침몰에 대한 가설들이다.

암초충돌설
사고 발생 초기에는 언론이 안개에 의한 암초 미발견으로 인한, 충돌가능성을 집중 조명하였다. 생존자 중 일부가 들었다는 '쿵' 소리와 당시 기상상황이 안개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 주장이었다. 백점기 부산대 선박해양플랜트기술연구원장은 배의 좌초로 인한 사고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해당 해역에 암초가 없으며, '쿵' 소리의 원인이 다른 데 있을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에 따라, 유력한 사고 원인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최근 발표된 사참위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세월호 선체 변형과 손상의 원인이 수중체 접촉에 의한 외부 충격일 가능성과 관련해,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여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구조결함설
세월호와 같은 RORO선은 구조적 결함으로 인한 사고의 위험성이 국제적으로 자주 지적되던 선박이다(RORO선 사고 목록 참조). 2009년 11월 일본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건조하여, 마루에이 페리사가 운행하던 아리아케호가 침몰했다. 이 선박은 과거 세월호가 나미노우에호로 활약하던 시절 운행한 해운사가 동일했고 선박 디자인과 배수량이 유사한 RORO선이다. 2009년 아리아케호 사고 직후, 마루에이 페리는 동일 선박인 나미노우에호를 2012년 퇴역시켰다. 그것을 청해진해운에서 수입하여 1년간 개조하였으며, 2013년 3월 이름을 세월호로 개명하고 운행을 시작하였는데 1년 1개월 만에 좌초된 것이다. 한 해상전문가는 "선체가 그렇게 빨리 기운다는 것은 선박 복원력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데, 이는 선박의 구조적 결함이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에 대하여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주장은 참사 직후부터 제기되었는데, 이와 관련해 선사 임직원 대상 2심 재판에서 “조타기의 비정상 작동 가능성 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결론 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사참위 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조타기와 관련된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세월호의 급격한  우선회와 횡경사를 유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하여 내인설의 주요 주장 중 하나인 조타기 고장설이 기각된 바 있다.

구조변경설
한국해양대 해사수송과학부 김길수 교수는 사고의 원인이 구조변경에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세월호는 2012년 10월 일본에서 수입된 뒤, 이듬해 3월까지 전남 목포에서 객실을 증설하였다. 3~5층에 객실이 증설되었고 승선정원은 181명 추가된 921명으로 많아졌으며, 선박 무게도 239t 증가했다. 이에 따라 무게중심이 원래보다 높아졌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배를 급격히 돌린다고 전복이 되지는 않는다" 며 "구조 변경 과정에서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갔다면 내ㆍ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졌을 때 배가 뒤집힌다" 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세월호 등록 검사를 맡았던 한국선급 관계자는 "객실 증설은 합법적인 공사, 점검 결과 운항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와 등록 검사를 정상 통과했다" 고 밝혔다. 한편, 객실만 증축한 게 아니라, 배 앞쪽 램프웨이도 철거한 것으로 드러났다. 출입구를 줄이면 화물을 더 실을 수 있고, 배 전체 무게가 가벼워져 그만큼 객실 증축에 유리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쪽에만 있던 램프웨이를 없애면서 오른쪽이 너무 가벼워진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변침설(항로변경설)
변침(變針) 이란 여객선이나 항공기 운항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 항로를 변경한다는 뜻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세월호가 급격한 변침으로 무게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쏠렸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침몰한 세월호가 좌로 기울었다는 점도 이같은 분석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임긍수 목포해양대 해양운송시스템학부 교수는 "세월호 여객선 참사 원인이 암초가 아닌 급선회에 따른 외방경사로 추정된다" 고 밝혔다. 그는 유속이 빠른 해역에서 선박이 회전하게 되면 선체가 5~ 10도가량 기울게 되고 그 영향으로 선체에 실려 있던 컨테이너나 화물이 한쪽방향으로 쏠려 선박과 충돌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설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사고 당시 발생한 '꽝' 소리는 결박된 화물들이 풀리면서 선박에 부딪혀 발생한 소리로 보고 있다. 이 설은 17일 해경이 긴급 브리핑에서 잠정 결론으로 발표한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월호에 실려있던 차량 블랙박스를 통해, 선체가 10초만에 52도까지 급격하게 기울고 난 뒤에 차량이 움직이는 장면이 확인되면서, 변침이나 화물쏠림으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속도로 선체가 기우는게 확인되었다. 또한, 2014년 국내 선박해양연구소의 모형항주실험을 통해, 2014년 당시 검찰이 주장했던 세월호 급변침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연구결과가 나왔지만, 4년간 은폐되었다가 2018년 3월이 되어서야 연구사실이 밝혀졌으며, 2018년 1월, 네덜란드에서 정부가 발표한 AIS 항적을 수백번 실행했으나, 어떤 경우의 수를 두더라도 정부가 발표한 항적을 그리지 않았다.

내부폭발설
공길영 한국해양대 교수와 임교수는 이견을 보였다. 그는 "변침은 침몰의 1차적 사고 원인이 아니다. 배가 이미 기운 상태에서 변침을 시도했다면 문제가 된다" 며 "가능성이 낮다" 고 했다. 그는 "조타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미 기울어진 상황에서 조타 장치를 작동해 봐야 무용지물이다" 면서 "내부에서 폭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컨테이너에도 무엇이 실렸는지 봐야 한다" 고 말했다. 그는 암초설에 대해서는 해양 조사원들이 해도에 항로에 있는 암초들을 기입해둘 뿐 아니라 승무원들도 그 항로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며 암초에 의한 좌초가능성을 일축하였다.

과적 및 선체결함설
이 견해는 2014년 4월 19일자 오전 10시경 부산일보와 그날 오후에 종편 방송사 JTBC에서 제기한 것이다. 부산일보 4월 19일자 보도 상, 한국해운조합에 따르면 세월호는 4월 15일 출항 전 화물 657t, 차량 150대를 실었다고 조합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실제 확인 결과 세월호는 화물 1천157t, 차량 180대를 싣고 있었기에 이는 화물은 무려 500t, 차량은 30대를 초과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곧 화물 500t 차량 30대 초과한 상태에서 밧줄로 제대로 묶지도 않았기에 선박 하중조절 실패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견해이다.

한편 세월호에 얼마 전까지 근무했던 기관사는 먼저 선박이 회전을 할 때 균형을 잡아주는 선박 양 측면의 스태빌라이저가 결함이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스태빌라이저는 선박 측면에 날개 모양의 형태로, 선체의 안과 밖을 반복적으로 왕복한다. 급회전 시 이 스태빌라이저가 작동하지 않으면 배가 기울어져 버린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는데, 화물의 과적재이다. 이에 대해 청해진해운 측은 과적재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JTBC는 이를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세월호의 전체 중량은 6,825톤인데, 이것은 선박 자체, 화물, 승객, 연료 등의 무게를 모두 더한 수치다(만재배수톤수). 이 무게를 넘어서게 되면 과적이 돼 출항을 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세월호 배 자체의 무게는 3,031톤, 선사 측이 밝힌 화물과 승객 무게는 3,638톤이다. 모두 더하면 6,825톤을 넘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배의 연료와 평형수 등의 무게가 누락돼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연료로 쓰인 벙커C유와 내부 발전용인 경유를 환산한 무게는 약 160톤으로 이를 더하면, 6,825톤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윤종희 한국해양대 교수는 "모든 것을 실은 상태에서 거기 화물도 있고, 연료·물·선용품 음식 등 이런 거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 종류도 다 포함돼요."라고 밝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청해진해운 측은 답변을 하지 않았다.

또한, 평형수 문제 역시 선박의 동적안정성을 저해할 수 있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승객들의 증언에 따르면, 세월호는 침몰되기 한 시간 전인 7시 40분경부터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된 데는 이른바 평형수 탱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평형수 탱크는 선박 가장 아래 부분에 위치하는데, 좌우 3개씩 모두 6개의 물탱크로 이루어져 있다. 평형수는 해수를 담아 배의 좌우 균형을 맞춰준다. 그런데, 최근까지 세월호에서 일했던 전직 선원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물이 한쪽으로 실리는 경향이 있어요. 한 번 물을 딱 맞춰 놓으면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즉, 좌우 균형이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JTBC는 평형수 시설이 2월에 수리를 하고, 안전점검까지 받아 통과했지만 그 이후에도 선원들은 전혀 고쳐진 바가 없다고 했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스태빌라이저 역시 부품이 없어 수리를 받지 못했고. 적재된 컨테이너 역시 쇠줄이 아닌 밧줄로 묶여 있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그러나 네티즌 '자로'의 다큐멘터리 '세월X'에 의하면 당시 세월호는 과적을 한 것이 사실이나 참사 당시보다 적게 실은 날이 단 4번 뿐이었고, 3배 이상 과적하여 운항한 날도 있어 이 가설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느슨한 결박설
세월호 전 항해사 김모씨는 4월 21일자 JTBC 뉴스 9 손석희 앵커와의 대화에서 스태빌라이저나 평형수, 변침 등의 문제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며, "침몰한 세월호는 결박을 제대로 안했을 것"이라 했다. 또, 인천항 선박의 화물 결박을 현장에서 직접 담당하는 인천항운노조는 컨테이너 결박에 꼭 필요한 라싱바와 브릿지피팅 같은 전문 장비가 세월호에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밝혔다.

그 외에도 잠수함 충돌설 등이 있다.

책임론
승객들을 선박에 두고 1차 탈출한 선박직 승무원들에 대하여 사회윤리적 책임이 거론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세월호 사고의 공학적·물리적 분석에 따른 직접원인보다 근본원인을 지적한다. 선박이라는 한 집단의 범위 내에서는, 선장 등 선박직 승무원들이 항해와 승객 구조임무 책임을 지닌 리더인데, 그들의 리더십 부재가 세월호의 침몰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몇 가지 근거로, 충분한 탈출 가능시간이 있었음에도(약 2시간) 승객들에게 "움직이면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과 해경에 구조요청을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시기적절한 유효 조치가 없었다는 점, 오히려 방송 지시의 합리성에 의문을 품고 구명조끼를 착용한 뒤 탈출을 시도했던 승객들이 생존율이 높았다는 점, 선장 이준석 등 선박직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뒤로 하고 1차 탈출했다는 점을 든다. 따라서 이 분석은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문제가 리더들의 판단착오와 책임감 부재로 인재(人災)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세월호 참사 직후 선장 및 청해진해운의 직원 대부분이 구원파 신도들이며, 구원파의 교리로 인해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것이라고 보도되었으나 이는 이후 사실이 아님이 정정보도 되었다. 한편, 세월호 선원들이 침몰사고 직전 자신들만 아는 통로를 이용해 배에서 탈출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2014년 4월 17일 오후 9시에 인천항에서 청해진해운 대표 김한식 대표가 나와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대한민국 사회
세월호와 대한민국 사회를 유비추론한 사회 전반의 책임론이 대두된다. 조선일보 이종현 기자는 "침몰하는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며, 세월호의 핵심승무원들이 승객들을 남겨두고 먼저 탈출하는 모습을 위기에 처하면 몰래 빠져나가는 재벌 회장, 국회의원 같은 한국 사회지도층의 모습과 닮은꼴이라고 지적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해경과 해군을 믿지 못하고 민간 잠수부 투입을 강하게 요구했다는 점, 해경이 민간 잠수부 투입을 막고 조롱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정부의 공식 발표보다 더 힘을 얻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이는 정부 스스로 권위와 신뢰를 잃은 결과라 지적했다.

최근 사참위 발표 내용
2022년 9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를 통해 발표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월호 침몰 원인
사참위는 내인설의 주요 근거로 제기되었던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세월호의 급격한 우선회와 횡경사를 유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세월호 선체 변형과 손상의 원인이 수중체 접촉에 의한 외부 충격일 가능성과 관련해, 사참위는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침몰 원인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내지는 못하였다.

세월호 참사에서 해경 등 초동대응의 적절성
조사를 통해 304명의 사망에 대한 해경 지휘부의 책임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해경 지휘부는 법령과 매뉴얼에 의해 분명한 의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위치로서 가용자원을 총동원하여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어야 했고, 세월호의 위급한 상황을 파악하여 출동세력으로 하여금 세월호 승객들의 퇴선을 유도할 수 있도록 지시를 내렸어야 했으나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해경 지휘부는 스스로 세월호의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고 승객의 신고 등으로 이미 확보된 정보도 출동세력에게 공유하지 않았으며 승객 신고와 현장 출동세력이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세월호의 위급성을 인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동세력에게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도 않았다.

세월호 참사에서 청와대 등 대응의 적정성
청와대는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의 명시적 규정에 따라 국가위기상황에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부재했던 컨트롤타워는 참사 이후 정부를 향한 국민 여론이 악화되면서 활발히 작동했다. 청와대는 정권 비판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론을 호도하고 국민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구분하고 나누는 행위도 자행했다. 청와대가 인식한 위기는 '정권의 위기'였고 특히 국론분열 양상이 나타났을 때 대통령·정부를 비판하는 개인과 단체를 '이념편향적', '종북세력'으로 몰아세우며 제재를 가했다. 그 과정에서 우파단체를 활용했고 이에 협력한 단체에 금전적 지원을 하거나, 적극적인 인사를 주요 보직에 임용하는 등 보수세력의 기반을 강화했다. 청와대는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세력에 선동된 모습으로 낙인 찍히게 만들었다. 이렇듯 박근혜 청와대는 피해자의 요구를 곡해하면서 사회적 갈등의 요인들을 강화하고, 특별법 등 향후 재난대응력을 위한 철저한 진상규명조차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정보기관(국정원, 기무사 등)의 세월호 참사 개입
위원회는 국정원과 기무사 등 정보기관이 유병언 일가 수사 및 검거 작전에 위법, 부당하게 지원한 사실 또는 정황을 확인했다. 당시 청와대는 세월호참사를 ‘전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국가적 재난으로 유병언 일가의 탐욕적인 재산 증식 과정에서 빚어진 참사’라고 규정하며 유병언 수사 및 검거 작전을 카드로 활용하여 세월호참사 정국에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고 정부로 향한 비난의 화살을 선주에게 돌리려 하였다. 국정원과 기무사는 이와 같은 청와대의 기조에 적극 부응하였다.

당시 기무사도 유병언 검거와 재산 환수가 세월호 정국을 종결하는 관건이라고 판단하고 ‘유병언 검거 TF’를 구성하는 등 적극 협력·지원하였다. 그 당시 기무사 인원들은 금수원 민간인 대상 감청,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민간인의 방대한 개인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한 것이 적법한 “행정응원” 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무사의 활동은 수사기관의 수사 활동으로 판단되고, 따라서 행정절차법상 행정응원에 해당할 여지가 없어 위법 또는 부당하다고 판단된다. 이와 같이 유병언 검거작전에 개입하였던 기무사의 위법 부당한 행동은 정례 보고를 통하여 청와대로 수시 보고되었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세월호 참사와 국가 범죄
세월호특조위의 진상규명 방해는 계획적·대량적·체계적으로 자행된 국가 범죄로 판단된다. 국가가 그 권력을 이용하여 국가 구성원인 개인에게 가해행위를 하는 등 국가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유린 행위를 설명하는 용어를 ‘국가범죄’라고 한다. 세월호특조위의 조사에 협조할 의무를 지닌 국가 기관이 오히려 직권을 남용하여 세월호특조위의 내부 동향과 조사 진행 현황 등을 사전 파악해 상호 공유하고, 파악된 동향을 바탕으로 세월호특조위의 조사를 방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구체적 대응방안을 상호 공모하여 수립하고 실행했다. 

416연대의 반응
416연대는 사참위의 조사활동 결과에 크게 실망하고 개탄하며 4가지 한계점을 지적했다. 첫째, 참사 당일 구조방기의 핵심 원인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둘째, 진실은 은폐하고 조사를 방해한 행위, 피해자 권리를 침해하고 사찰한 행위 등 광범위하게 자행된 국가폭력의 실체를 확인하였으나, 정보기관으로부터 자료를 원활히 받을 수 없어 그 전모를 추적하고 밝혀내지 못하였다. 셋째, 침몰원인마저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넷째, 넷째, 조사 과정과 조사 기구 운영에서 의사소통의 부재로 인한 혼선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냈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성역 없는 진상규명활동과, 국가의 세월호 참사 이후 자행된 광범위한 진상은폐와 피해자/시민 인권침해 등의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 및 후속 조치 요구 시민행동, 다른 재난참사 피해자와 각계각층 시민들과 연대 등을 통한 시민의 안전권 보장과 재난참사 피해자 권리보장을 위한 제도적 대책을 마련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한 현정부의 입장
사참위는 사회적 참사 특별법에 따라 종합보고서와 80건의 권고를 국회와 대통령에 보고했으며, 권고를 받은 국가기관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권고를 이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후 후속 조치와 관련하여 언론에 추가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추측해보건대 대선 당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대통령 후보자들에게 세월호 관련 6대 과제에 대해 응답을 요청하였는데, 그 당시 윤석열 후보자는 응답을 거부한 것과 같이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무관심한 기존의 입장 대로 사참위의 종합보고서와 권고사항에 대해서도 아무런 추가적인 대응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3년여간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던 세월호가 23일 오전 마침내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2014년 4월16일 사고 당일 침몰 중인 세월호(위)와 1073일 만에 끌어올려진 세월호(아래). 해양경찰청 제공

 

세월호 희생자 명단
단원고등학교
2학년 1반: 고해인, 김민지, 김민희, 김수경, 김수진, 김영경, 김예은, 김주아, 김현정, 문지성, 박성빈, 우소영, 유미지, 이소현, 이연화, 정가현, 조은화, 한고운 (18명)

2학년 2반: 강수정, 강우영, 길채원, 김민지, 김소정, 김수정, 김주희, 김지윤, 남수빈, 남지현, 박정은, 박주희, 박혜성, 송지나, 양온유, 오유정, 윤민지, 윤솔, 이혜경, 전하영, 정지아, 조서우, 한세영, 허다윤, 허유림 (25명)

2학년 3반: 김담비, 김도언, 김빛나라, 김소연, 김수경, 김시연, 김영은, 김주은, 김지인, 박영란, 박예슬, 박지우, 박지윤, 박채현, 백지숙, 신승희, 유예은, 유혜원, 이지민, 장주이, 전영수, 정예진, 최수희, 최윤민, 한은지, 황지현 (26명)

2학년 4반: 강승묵, 강신욱, 강혁, 권오천, 김건우, 김대희, 김동혁, 김범수, 김용진, 김웅기, 김윤수, 김정현, 김호연, 박수현, 박정은, 빈하용, 슬라바, 안준혁, 안형준, 임경빈, 임요한, 장진용, 정차웅, 정휘범, 진우혁, 최성호, 한정무, 홍순영 (28명)

2학년 5반: 김건우, 김건우, 김도현, 김민석, 김민성, 김성현, 김완준, 김인호, 김진광, 김한별, 문중식, 박성호, 박준민, 박진리, 박홍래, 서동진, 오준영, 이석준, 이진환, 이창현, 이홍승, 인태범, 정이삭, 조성원, 천인호, 최남혁, 최민석 (27명)

2학년 6반: 구태민, 권순범, 김동영, 김동협, 김민규, 김승태, 김승혁, 김승환, 남현철, 박세도, 박영인, 서재능, 선우진, 신호성, 이건계, 이다운, 이세현, 이영만, 이장환, 이태민, 정현탁, 정원석, 최덕하, 홍종용, 황민우 (25명)

2학년 7반: 곽수인, 국승혁, 김건호, 김기수, 김민수, 김상호, 김성빈, 김수빈, 김정민, 나강민, 박성복, 박인배, 박현섭, 서현섭, 성민재, 손찬우, 송강현, 심장영, 안중근, 양철민, 오영석, 이강명, 이근형, 이민우, 이수빈, 이정인, 이준우, 이진형, 전찬호, 정동수, 최현주, 허재강 (32명)

2학년 8반: 고우재, 김대현, 김동현, 김선우, 김영창, 김재영, 김제훈, 김창헌, 박선균, 박수찬, 박시찬, 백승현, 안주현, 이승민, 이승현, 이재욱, 이호진, 임건우, 임현진, 전준형, 전현우, 제세호, 조봉석, 조찬민, 지상준, 최수빈, 최정수, 최진혁, 홍승준 (29명)

2학년 9반: 고하영, 권민경, 김민정, 김아라, 김초예, 김해화, 김혜선, 박예지, 배향매, 오경미, 이보미, 이수진, 이한솔, 임세희, 정다빈, 정다혜, 조은정, 진윤희, 최진아, 편다인 (20명)

2학년 10반: 강한솔, 구보현, 권지혜, 김다영, 김민정, 김송희, 김슬기, 김유민, 김주희, 박정슬, 이가영, 이경민, 이경주, 이다혜, 이단비, 이소진, 이은별, 이해주, 장수정, 장혜원 (20명)

교직원: 고창석, 김응현, 김초원, 남윤철, 박육근, 양승진, 유니나, 이지혜, 이해봉, 전수영, 최혜정 (11명)

비 단원고 희생자들
일반 승객: 권재근, 권혁규, 김순금, 김연혁, 리샹하오, 문인자, 박성미, 백평권, 서규석, 서순자, 신경순, 심숙자, 우점달, 윤춘연, 이광진, 이도남, 이세영, 이영숙, 이은창, 이제창, 인옥자, 전종현, 정명숙, 정원재, 정중훈, 조지훈, 조충환, 지혜진, 최순복, 최승호, 최창복, 한금희, 한윤지 (33명)

선원들: 김문익, 박지영, 안현영, 양대홍, 이묘희, 정현선, 구춘미, 김기웅, 방현수, 이현우 (10명)

세월호의 의인들
세월호 승무원 박지영(22)씨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며 탈출을 도우며, 배에 끝까지 남아 있다가 결국 사망하였다. 생존자인 학생의 인터뷰에 따르면 "배가 기울면서 3층에서 난간을 붙잡고 있었는데, 승무원 누나가 뛰어내리라고 해 바다로 뛰어 내려 목숨을 구했다. 당시 10명이 함께 있었는데 구명조끼가 모자라 승무원 누나가 학생들에게 조끼를 양보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누나는 왜 조끼를 입지 않느냐."고 묻자 "너희들 다 구하고 나도 따라 가겠다."라고 답하였다고 전했다. 덕분에 그와 함께 있었던 학생들은 모두 구조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선원으로서 의무를 다 하다가 실종된 선원은 더 있었다. 세월호 사무장 양대홍(46)은 아내와 나눈 전화 통화에서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어. 수협 통장에 돈이 있으니까 아이 등록금으로 써.”라고 말했다. 아내가 ”지금 상황이 어떠냐.”고 묻자, 양 사무장은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 못 해. 끊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또, 결혼을 앞둔 사이였던 세월호 아르바이트생 김○○(28)씨와 사무직 승무원 정○○(28)씨도 사고 당시 학생들의 구조를 돕고 선내에 남아 있는 승객들을 구하러 들어갔다가 숨졌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6반 담임교사 남윤철은 16일 오전 10시쯤, 선실 비상구 근처에 있어 탈출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구명조끼를 나누어주는 등 대피를 돕다 사망하였다. 2학년 5반 담임교사 이○○(33)은 난간에 매달려 있는 제자들의 탈출을 돕다가 실종되었고, 체육교사 고○○(43)도 제자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탈출을 돕다가 본인은 나오지 못했다. 최혜정 교사도 사고 상황 속에서 SNS메시지를 통해 학생들에게 "걱정하지 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고 말하며 학생들을 구출하였다. 이후 그녀는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교사 김○○ 역시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구조된 후 자살한 강○○ 교감도 앞장서 출입구를 열고 올라가 "너희 거기 있으면 다 죽는다. 힘이 들더라도 여기로 올라와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대학생 일행의 탈출을 도왔고, 먼저 구조될 수 있었음에도 "빨리 나와라. 이쪽으로 와라."고 외치며 끝까지 학생들을 구하다 나중에야 배에서 빠져나왔다.

단원고등학교 학생 정차웅 군은 아수라장이 된 선실에서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건네주고, 물이찬 선실에 갇힌 친구들을 구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끝내 사망하였다. 단원고등학교 학생 양온유 양 역시 침몰 직후 갑판으로 나와 구조될 수 있었으나 선실에 남아있는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채 다시 물이 차오르는 선실로 들어갔고 끝내 나오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단원고등학교 학생 조○○은 배가 기울자 여학생 방을 찾아 구명조끼를 나줘주며 대피하라고 알리고 여학생을 직접 끌고 올라오는 등 20여명을 구해냈다. 단원고등학교 학생 박○○ 역시 울고 있던 어린 아이를 급히 업고 구명보트에 뛰어올라 둘 다 생환할 수 있었다. 박군은 "나도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부모를 찾으며 울고 있는 아이를 두고 먼저 나올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배관 설비사 김○○(59)은 제주도에 있는 건축회사에 첫 출근을 하던 중 사고를 겪었다. 그는 배가 기울어지던 30여분 동안 주변 사람들과 함께 소방호스와 커튼을 묶어 선박 1층에 있던 학생 20여 명을 6~7m가량의 위층 난간으로 올려주었고 그 자신을 포함하여 이들은 모두 생환하였다. 그는, 그 사이에 1층에는 물이 가득 차는 바람에 더 많은 학생들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화물 운전기사 김○○(50)은 사고 당시 여객선 3층 화물운송 기사 전용 객실에서 동료 기사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배가 기울자 일반 객실이 몰린 4층으로 이동해 호스와 밧줄을 던져 10여 명의 사람들을 구하고 생환하였다. 특히, 그가 구한 이들 가운데는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이사를 가다가 사고를 당한 어린이 권○○(6, 여)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사자 지정
보건복지부는 5월 12일 '2014년도 제3차 의사상자심사위원회'를 열어 세월호 사고로 숨진 승무원 박지영(22·여), 김기웅(28), 정현선(28·여)씨 등 3명을 의사자로 인정하였다.

인천광역시는 5월 23일 세월호 사무장 양대홍씨를 의사자로 지정해달라며, 유족의 동의를 얻은 뒤 목격자 진술, 필요 서류 등을 갖춰 이날 오후 보건복지부에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시의 한 관계자는 "신청을 위해 필요한 자료를 모두 갖췄다"며 "복지부에서 결정할 사안이지만 국민적 여론이나 언론 보도 내용 등을 고려할 때 의사자 인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양 사무장은 세월호 고위 승무원 가운데 유일하게 탈출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승객 구조를 위해 배를 지키다가 끝내 숨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사고 초기부터 이들 '살신성인' 교사들을 의사자로 지정해달라는 누리꾼들의 청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의사자' 신청은 유보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교사 유가족들은 '순직' 처리를 통해 국가 유공자로 등록되는 것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쓰다 숨졌다'는 점을 입증해 의사자로 등록하기 보다는 국가공무원으로서 공무수행 중 희생당했다는 점을 인정받는 것이 용이해 이 같은 방향으로 추진 중으로 전해졌다. 모든 교사가 공무상 사망을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고로 희생되거나 실종된 교원 12명 중 기간제 교사인 2명은 공무원이 아니며, 이들은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의 '공무상 사망'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못 된다. 한편 유가족 대책위는 '세월호 특별법'에 단원고 교사와 학생들을 전원 의사자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또한 의견이 나뉘어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사건은 한국 학부모들의 학교 교육에 대한 마인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불특정 다수가 사망한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참사, 이태원 압사 사고와 달리 특정 학교의 특정 학년이 학교에서 단체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당한 사고였고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상황이 생중계되었기 때문에 특히 학령기 자녀를 둔 학부모들의 충격이 매우 컸다. 사건 이후 수학여행과 수련회 등 학교 차원의 단체 여행 사업이 교육계에서 완전히 종말을 맞이했고 홈스쿨링과 대체교육, 가족 체험학습 등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유행을 타기 시작한 것도 세월호 사고 이후이다. 이 같은 한국 부모들의 자녀 과잉보호는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대유행 시국에서 더욱 두드러져 많은 학부모들이 등교 개학 이후 자녀들의 건강을 크게 우려했고 한 나라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드는 학기제 전환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으며 대한민국이 OECD 국가들 중에서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화 해제가 가장 늦어지기도 했다.

급기야 2023년 1월 28일 초등학교 수학여행에 일부 학부모가 몰래 따라가서 미치겠다는 한 초등 교사의 하소연이 기사화될 정도로 한국 부모들의 학교 교육에 대한 마인드는 세월호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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