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 Children'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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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은 어린이(유아, 초등학생)를 기념하는 날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제정되는 기념일이다.

 


아동복지법 제6조(어린이날 및 어린이 주간)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보호의 정신을 높임으로써 이들을 옳고 아름답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나도록 하기 위하여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하며, 5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를 어린이주간으로 한다.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고, 어린이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이다. 미래 사회의 주역인 어린이들이 티없이 맑고 바르며,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어린이 사랑 정신을 함양하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제정한 기념일로, 매년 5월 5일이며, 법정 공휴일이다. 5월이 가정의 달이라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며, 5월의 꽃이라 불린다. 이 날에는 어린이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행복을 선사하는 취지의 기념행사가 전국 각지에서 열린다.

대한민국에서는 매년 양력 5월 5일이 어린이날이며, 이는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토요일, 일요일이나 부처님오신날에 겹칠 경우 대체휴일제의 적용을 받는다. 그리고 대형마트 의무휴업에는 절대 걸리지 않는 공휴일 중 하나다.

5월 5일로 어린이날이 지정된 이후로도 어린이날을 요일제로 바꿔 연휴를 만들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어린이날을 월요일로 하여 토-일-월 연휴를 만들거나, 금요일로 하여 금-토-일로 연휴를 만들자고 하는 것을 그 주장의 가장 큰 근거로 삼는다. 이에 더해 어린이날을 5월 첫째 주 금요일로 하고 어버이날은 그 이후에 오는 월요일로 하여 금-토-일-월 4일 연휴를 만들자는 주장도 있다. 2015년에는 홍익표 의원이 발의하여 국회에서 어린이날을 5월 첫째 주 월요일로 옮기는 법안을 추진한 적이 있으며, 2016년에는 해피먼데이 제도를 추진하여 어린이날을 5월 첫째 주 월요일이나 금요일, 혹은 둘째 주 월요일로 바꾸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밖에도 5월 5일이 낀 토요일을 어린이날로 만들자는 주장과 어린이날을 어버이날과 합쳐 (가칭) '가정의 날'이나 '가족의 날'로 하는 주장도 있다.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의 경우 어린이날이 수요일이며,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은 일요일이고 한글날과 크리스마스가 토요일이 되어 그 해 적어도 5개 이상의 공휴일이 주말과 겹치게 된다. 2032년에는 이것으로도 모자라 부처님오신날과 추석 연휴 첫 이틀까지 더해 어린이날 이후로 8일이나 되는 공휴일들이 사라진다.

과거 조선 시대에는 부처님오신날이 어린이날 비슷한 구실을 했다. 물론 지독한 숭유억불 때문에, 불교에 관대했던 일부 군주들의 재위기를 제외하면 국가 차원에서 팍팍 밀어주는 날은 절대 아니었다.

어린이날 탄생 이전에는 어린이라는 낱말이 없었고 '애기, 애새끼, 어린것, 아이들, 애, 애들, 사내아이(남자), 계집애(여자)' 등으로 불렸으며, 의무교육이 시행되지도 않았고 교육의 혜택을 받는 어린이도 많지 않았다. 대개의 어린이들은 그저 '어른의 축소판'으로만 취급받으면서 아주 어릴 때 최소한의 돌봄만 받은 후, 곧바로 농사일을 하러 나가거나 도시로 나가 공장에서 일을 했다.

방정환이 생각한 ‘어린이’는 티 없이 맑고 순수하며 마음껏 뛰놀고 걱정 없이 지내는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에서 어린이들이 그런 이상에 다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래서 현실이 가혹할지라도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자 관련 운동을 많이 했는데, 그 일환으로 어린이날이 만들어졌다.

1919년에 3.1 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일깨워 주고자 진주를 시작으로 각 지역에 소년회가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토요대학 아동미술과에 입학한 방정환은 아이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눈을 뜨고 1921년 김기전, 이정호 등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펼쳤다. 그러고는 아이를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의 독립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1922년 4월 각 소년운동 단체, 신문사 등이 모여 논의한 결과 어린이날은 ‘새싹이 돋아난다’는 의미로 새싹이 돋아나는 5월 1일을 어린이 날(소년일)로 정하고 그 해에 천도교소년회에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였다.

이듬해(1923년) 3월 16일 소파 방정환을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이 소년운동 활성화를 돕고자 일본 도쿄에서 색동회를 발족하였고, 같은 달에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했다. 4월 17일에는 색동회는 각 소년운동 단체들을 조직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만들었다.

1923년 5월 1일 색동회 창립과 동시에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 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기념 행사의 표어는 "희망을 살리자, 내일을 살리자", "잘 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였으며, 어린이가 미래의 희망임을 강조하였다. 기념식 후 200명의 소년들이 경성 시내를 4구역으로 나누어 집집마다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였다. 어린이날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어린이 운동가들은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하는 구호를 외치며 아이들의 가장 간절한 희망사항 10가지를 담은 '어른에게 드리는 선전문'을 배포했는데, 그 속에는 '이발이나 목욕을 때맞춰 해주세요',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해주세요', '산보와 소풍을 가끔 시켜주세요' 같은 것도 있었다. 이런 외침도 어린이날만 지나면 잠잠해졌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아동 인권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이후로 어린이날은 전국에서 열리는 기념행사로 발전했다. 초창기에는 잔칫날이라기보다는 어른들에게 어린이날 및 어린이도 인격을 갖고 있음을 알리는 날이었다. 전국 거리를 행진하면서 전단지 등을 나눠주는 일을 어린이들이 했는데, 1925년 행사에는 전국에서 약 30만 명의 어린이들이 참가하여 길거리에 나갔고, 1933년 어린이날에 소년단 소속 어린이들은 새벽 6시부터 어린이날을 고하는 새벽나팔을 분 뒤, 선전지 배포에 총동원됐다고 한다.

5월 1일은 노동절과 겹쳤기 때문에 1927년부터는 좀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어린이날 행사를 5월 첫째 일요일에 열었다. 이때 동화와 동요 대회, 미술 전람회 등 어린이들이 직접 참가하거나 관람할 수 있는 행사들이 많이 열렸다.

어린이날이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지자 어린이 운동이나 어린이날 행사가 민족의식을 높일 것을 염려한 일제는 1934년에 《어린이》를 폐간시키고 1937년에 소년단체 해산명령을 내려 어린이날 행사도 금지시켰다. 어린이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학교에서 수업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어린이날은 1939년부터 중단되었다.

어린이날 노래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어린이날 노래 / 작사: 윤석중 / 작곡: 윤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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