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부근 해상에서 일어난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대한 북한 해군 경비정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어 30분가량 진행된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의 선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도중 침몰하였고, 정장(참수리급은 150톤급으로 "함"이 아닌"정" 지휘관도 "함장"이 아닌 "정장")을 포함한 승무원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하는 인명피해를 겪었다. 조선인민군 해군소속 등산곶 684호도 대한민국 해군의 반격으로 전투후 상당한 피해를 입고 예인됐다. 제2연평해전으로 조선인민군 해군 13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열기로 들떠있던 와중에 일어난 역사적 사료에 기록된 사건으로 대한민국 내에서는 서해 북방한계선 침범시 차단 기동에 대한 논란이 일었으며, 이후 차단기동은 교전수칙에서 삭제되었다.
1999년 6월 15일 참수리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던 중 남북간 전투가 발생하여 제1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2일,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무효임을 주장하고, 인민군측 해상 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측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제1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은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이날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이남지역에서 북한의 무력 기습도발로 남북 간 충돌이 일어났다.
교전수칙에 따라 차단기동으로 대응하던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를 향한 북괴군 등산곶 684호의 지근거리 기습 함포공격으로 시작되어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이 된 전투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하고, 전투 종료 후 복귀 도중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한편 북한 반동 괴뢰군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예인되어 퇴각하였다.
집중포격을 당한 참수리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1계급 추서)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고, 부정장 이희완 소령(당시 중위)이 쓰러진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이희완 소령은 총상으로 한쪽 종아리의 근육을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군 당국은 전군에 경계 강화령을 내리고 서산 상공에서 초계비행하던 KF-16 전투기 1개 편대를 NLL 인근 해상으로 긴급 파견해 확전에 대비했다. 청와대 또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는 등 비상태세에 들어갔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NSC에서 "북한 경비정이 선제 기습사격을 가하는 등 무력도발 행위를 자행한 것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는 행위로 묵과할 수 없다"며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군 당국이 더욱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춰 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6월 29일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ㆍ4위전 경기를 시청하려던 계획을 취소했으며,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30일 일본을 방문하는 일정도 다시 검토됐으나 일정 취소가 국민 불안감을 높이고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를 촉발시킬 수 있다고 판단해 그대로 진행시키기로 했다. 그리하여 김대중 대통령은 공동 개최국 대표로서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참석과 일본 총리와 갖는 정상회담을 위해 6월 30일 오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2007년 6월 28일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한 차기고속함 1번함이 윤영하함으로 명명되어 진수되었으며, 2009년 6월 2일 실전배치되었다. 2009년 9월 23일 STX조선해양에서 2번함이 한상국함으로, 3번함이 조천형함으로 각각 진수되었다. 2009년 12월 11일 한상국함과 조천형함에 이어 STX조선해양에서 4번함인 황도현함, 5번함인 서후원함이 각각 진수되었다. 2010년 7월 28일 한진중공업에서 6번함인 박동혁함이 진수되었다.
날짜 2002년 6월 29일
장소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북방한계선(NLL)
결과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승리
교전국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정장 해군 대위 윤영하†
부장 해군 중위 이희완 정장 대위 김영식†
병력
대한민국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2대
고속정 6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 2대
피해 규모
참수리 고속정 357호 침몰
6명 전사
18명 부상 초계정 등산곶 684호 파괴
13명 전사
25명 부상
두 번째로 연평도 근해에서 해전이 벌어졌던 그날도 도합 2척의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과 등산곶(육도) 388호정이 NLL을 1.1km 침범하였고 이에 해군 고속정 4척이 교전수칙대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참수리 편대는 각 편대별로 경비정 1척씩을 맡아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는데 이 중 684를 맡은 232편대에서는 편대장 김찬 소령이 좌승했던 기함인 358정이 선두를 맡고 357정은 300야드(274m) 정도 뒤에서 북한 경비정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윽고 참수리들이 차단 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684의 전진방향의 횡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684가 358을 지나친 순간 갑자기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358정의 뒤를 따르던 357정은 갑자기 정지한 684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었고 이로 인해 357의 좌현이 그대로 684에 노출되었다. 이때 두 함정의 거리는 500야드(457m)로 북한 경비정의 조악한 수동 조작식 구형 육군용 대공포 및 신형 취급받던 T-34-85의 주포 ZIS-S-53 85mm 전차포로 철갑탄을 쏘더라도 초탄 명중이 가능한 거리였고 무엇보다 78식 저격보총의 사거리 내였다. 북한 경비정이 경고 사격없이 선수의 ZIS-S-53 85mm 전차포를 357호정에 사격함으로써 교전이 시작되었다.
최초 보고는 4명 전사, 19명 부상, 실종 1명, 무사고 4명이었다.
하지만 실종된 한상국 상사가 SSU 대원들에 의해 바다 속에 가라앉은 357정의 조타실에서 발견되었고 의무병 박동혁 수병이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6명 전사, 18명 부상으로 최종 집계되었으며 참수리 357정이 대파당한 것 때문에 전투후 침수 과다로 최종 격침당했다.
아군 함정들은 북측 함정이 퇴각하는 것을 레이더로 확인한 후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 퇴각하였지만 참수리 357정은 기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ZIS-S-53 85mm 전차포 5발, V-11-M 계열 2연장 37mm 함포 19발, ZPU-4 234발 도합 모두 258발과 88식 보총, 73식 대대기관총, 7호 발사관, 78식 저격보총, 31식 60mm 박격포를 포함한 각종 중화기 공격을 받고 격벽에 구멍이 뚫려 침몰하고 있었다. 357, 358정의 장병들은 358정의 해수 펌프까지 동원해 가면서 승조원 중 상당수가 부상당한 상황에서조차 배수작업을 했다. 배가 급격하게 우현으로 기울자 253 편대 소속 328정까지 가세해 357정 우현에 계류시켜 중심을 잡고 328정이 예인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너무 피해가 컸기 때문에 침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6월 29일 정오 참수리 357정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으며 41일이 지난 8월 9일 바닷속에 잠겨있던 참수리 357호를 인양했으며 실종된 한상국 중사의 시신도 수습되었다.
북한 해군 등산곶 684호정의 포탄 88%가 고속정 좌현에 집중됐다. 위치별로는 주갑판 상부에 122발, 주갑판 하부에 136발씩 피격됐으며 주갑판 하부중 선체에 치명적인 흘수선(바닷물과 선체가 접하는 부분)에 모두 42발의 피격 흔적이 있었고 특히 85㎜ 전차포에 의한 피격 5발 중 2발이 흘수선 부근에 명중돼 축구공만한 구멍이 났다.
이에 따라 아군 20mm 벌컨포 2문 관통 및 전원케이블 손상, 레이더송신단, 통신기 전원, 좌현측 추진엔진과 발전기가 각각 피격받았고 조타실 화재로 인한 천장 및 장비 손실, 통신실 화재로 통신기 열 손상, 정장실, 승조원 침실 구역(6개 격실) 화재 및 내부 붕괴 등의 손실이 발생했다. 국방부 조사에서는 지휘기능을 지닌 조타실과 함교에 59발, 기관실에 60발, 흘수선에 10발의 포탄이 명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북한 경비정의 공격에 대응해 고속정 357호는 포대에 장전된 1천132발 중 중구경 40㎜ 보포스 기관포 6발과 20㎜ 시 벌컨 도합 674발을 발사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제1연평해전 이후 당시의 김대중 대통령이 북방한계선을 지키고 선제공격을 하지말것 상대가 먼저 발사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격퇴할것 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것으로 이루어진 4대 교전수칙을 지시하여 해군이 ‘밀어내기’로 불리는 차단기동 개념을 도입했으며, 이후 제2연평해전에서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교전지침, 차단기동 도입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경고방송->차단기동->경고사격->위협사격->격파사격] 5단계로 합참의 해상 작전지침이 존재했으며 제1연평해전 에서도 똑같은 교전지침과 차단기동을 사용했지만 대승을 거둔 바 있다. 당시 이준 국방장관은 "김대통령이 1999년 연평해전 기간에 4대 지침을 내렸지만, 이는 1997년 작성된 합참 작전예규에 이미 포함돼 있었으며 교전규칙의 기본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이지, 햇볕정책 때문에 추가되거나 수정된 것은 아니다"고 답변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만에 여는 것은 늦장 대응이라는 비판이 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이회창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는 의원총회에서 “정부는 서해도발이 우발적이라고 하면서 미국 일본에 냉정한 대응을 요청했다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라고 주장했다.
황장엽은 탈북자동지회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려, “대포 한 발이 아니라 총 한 방을 쏘는 데도 김정일의 재가가 필요한 북한 군부 내에서 김정일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포 사격을 명령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북한 군부내 강경 세력의 돌출행동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이는 북한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라고 주장했다.
서울법대 교수 조국은 오연호와 공저한 책《진보집권플랜》에서 연평해전과 관련, "서쪽에서는 해전이 벌어지고, 동쪽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떠나는 모순적인 상황을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됐다"고 주장했다.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30일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사이타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에 참석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냉정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함께 했으며,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태도에 분노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 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라고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였다.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해군장으로 거행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군 장례식은 장례위원장 이하만 참석하는 것이 관례다." , 총리실은 "참석 요청이 없었을뿐만 아니라 의전을 고려해 불참했다."라고 해명했다. 이후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식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DJ)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비판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출처 필요]
보상금 논란
제2연평해전 유족은 사망보상금과 연금, 퇴직수당 등을 합쳐 윤소령 가족의 경우는 사망보상금 5,600만원 포함 1억원 이상, 나머지 전사자와 실종자 가족의 경우는 사망보상금 약 3,100만원 포함 6,000만원 가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을 두고 보수 단체에선 정부와 여성부를 보상금 지급량이 너무 적다는 문제로 비난한 바 있으나, 이당시 정부는 전사자에 대한 법 규정의 문제로 보상할 수 없었다. 2002년 제2 연평해전 당시 군인연금법으로는 순직과 전사가 구분되지 않아 포괄적인 개념의 공무원 사망자로 규정, 전사자로 취급받지 못해서 추가 보상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정부는 우회적인 방안으로 국민성금을 해서 전사한 6명의 장병에게 정부 지원금 포함해서 도합 3억 5,000만원의 보상금이 전달되었다.
문제가 된 군인연금법은 박정희 정부 당시 베트남전 전시 전사자가 많아지면서, 국고의 고갈을 걱정한 정부가 교전 중 사망은 공무 중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고 사망보상금은 사망 직전 받았던 월급의 36배로 못박아 국가로 하여금 그 이상 지급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추가로 1967년 국가보상법 2조를 제정, 직무수행중 입은 손해에 대해 보상을 받은 경우, 국가가 잘못이 있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에 2002년 7월 국방부는 전사자의 공로에 비해 보상금이 지나치게 적다는 지적에 따라 `공무사망'으로 통합돼 있던데서 `적과의 교전에 의한 전사'를 분리하여 보상을 할 수 있도록 군인연급법 시행령 등 관련법령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2004년 1월 국방부는 그 동안 개정을 추진해온 군인연금법 시행령 개정안이 공포되어 이는 국내외 전사자들에게 모두 적용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는 소급 처리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제2연평해전 유가족은 전사자 사망 보상금 2억원을 받지 못하고 3,000만~6,000만원 규모의 공무 보상금을 지급받는데 그쳤다.
2010년 5월 국방부는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게 전사자 사망 보상금을 소급 지급하려면 특별법을 제정할 수 밖에 없다" 고 밝혔다. 이후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게 전사자 예우를 하는 특별법 제정이 발의되었으나 무산되었다. 10월 14일 국방부 예비역정책발전 TF팀은 공문을 보내,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 전사자 예우를 해줄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해당 공문에서 "각종 대침투작전과 국지전, 북한 도발에 따른 아군 전사자 등의 형평성 침해논란이 예상돼 법적 안정성 등을 위해 소급보상이 불가하다"고 밝혔다. 천안함 침몰사건(2010년 3월)의 경우에는 2004년 개정된 군인연금법의 적용을 받아 천안함 용사 유가족들은 사병의 경우 사망보상금으로 일시금 2억 원, 원사는 3억 5,900만 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2018년 7월 '제2연평해전 전사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및 시행되어 1인당 최소 1억 4,000만원에서 최대 1억 8,000여만원까지 추가로 보상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정부의 조치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정부는 2002년 6월 30일 교전 과정에서 전사 또는 실종된 해군장병 5명에게 일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을 추서했다.
2002년 6월 30일 국군수도병원 합동분향소에는 이한동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군 장병 등이 방문했다. 이 총리 등 국무위원 일행 21명은 이날 합동분향소를 방문, 헌화 및 묵념하고 고(故) 윤영하 소령에게 충무무공훈장, 고(故) 조천형 중사등 사망 및 실종 병사 4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을 각각 추서했다. 이 총리는 이어 병실을 찾아 부상장병 19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훌륭하게 싸웠소. 용감했소"라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2002년 7월 2일 일본에서 귀국한 김대중 대통령은 "만약 북한이 또다시 군사력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려 한다면 그때는 북한도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이어 국군수도병원을 방문, 서해교전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위로했다. 교전 발생후 한달뒤인 7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서해교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장병 5명의 가족 12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했다.
참여 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 1주기를 앞둔 2003년 6월 25일에 유가족들과 국가유공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고 이어서 2003년 6월 27일 2함대를 방문하여 안보공원에 전시된 참수리357호정을 방문하여 묵념하고 헌화하는 등 추모하고 이후 참수리357호정에서 다리를 잃었지만 복귀한 이희완 중위에게 위로전화, 그 외에도 명절마다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이명박 정부
대한민국 국방부는 처음 서해교전(西海交戰)이라고 부르던 것을 이명박 정부 집권 후 곧바로 2008년 4월에 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제2연평해전 추모식을 정부기념행사로 승격시켰으며, 주관 부서도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옮겼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제2연평해전 10주년 행사에 참석하였으며 군 통수권자가 제2연평해전 관련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2002년 해전 이후 처음이었다.
재발 방지 및 대응
대응기동 개정
무려 5단계에 이르던 대응기동 절차는 해군의 손실을 불러왔다. 참수리 357호도 차단기동 중 기습을 당했다. 기존에는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이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차단기동'이었는데 기습공격을 받기 가장 쉬웠다. 이에 국방부는 2002년 7월 차단기동 과정을 삭제했으며, 2004년 시위기동과 경고방송을 동시에 하도록 하여 경고방송·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3단계로 개정했다. 이는 후에 2009년 벌어진 대청해전의 승리의 바탕이 되었다.
초계활동
제2연평해전에서 초계함의 늦은 대응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교훈으로 삼아, 참수리 고속정들이 초계함의 사정거리 안에서 활동하게 하여 대응을 높였다.
개량사업
국방부는 참수리 357호가 조타실에 85mm 포탄에 명중당하여 파손된 것을 보고 방어력을 향상시키도록 했다. 이에 1함대와 2함대 소속 참수리 고속정 45척이 개량되어 방어력이 향상되었으며, 화력 향상을 위해 M60(7.62mm)기관총을 K6(12.7mm) 기관총으로 교체했다. 또한 30년을 써온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하기 위해서 개발된 PKX-A를 '윤영하급 고속함'으로 명명했고, 2007년 진수되었다. 참수리 고속정이 가장 강한 화력이 40mm 기관포에 불과해, 적 함을 격침하기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여 윤영하급 고속함에는 76mm 속사포를 장착, 화력을 증강하고 대함미사일인 해성 미사일을 탑재했다
기념
전시
해군은 인양된 고속정 357호정이 선체 구조물의 비틀림 현상과 장기간 침수로 재사용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평택 2함대사령부 충무동산에 전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영화 제작
2013년 10월에 영화 《NLL-연평해전》 이 개봉될 예정이었다. 김학순 감독이 제작 지휘를 하며 김무열, 진구 등이 출연한다. 특히 제작비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조선일보의 보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의 지원과 일반 국민의 모금 활동으로 제작비를 충당하여 제작되고 있다. 출연자와 제작진의 재능 기부로 15억 원만 모이면 3D 전쟁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으나, 1, 2차 크라운드 펀딩, 개인 투자자들의 합류로 2억 5,000여 만원이 모여 제작비가 부족해졌다. 결국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2013년 4월 22일부터 촬영을 시작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어려운 상에서 제3차 크라운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충당했다.
해당 영화는 《연평해전》이라는 제목으로 2015년 6월 24일 개봉하였다.
제3 연평해전 시나리오
남한의 육군 재래식 전력은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을 압도했지만, 북한의 간첩선과 고속정 등을 타격하는데 중점을 둔 것 때문에 제 2차 연평해전이 발생한 2002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해군은 연안해군의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해군의 함선들은 방공/대잠 능력이 전무한 2차 세계대전의 군함과 다를 바가 없었고, 이는 북한이 남한에 해상도발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러나 2008년,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의 건조와 충무공 이순신급 (KDX-2), 유도탄 고속정들의 대량 도입 등으로 인해 일본/중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방어를 할 수 있는 수준의 대양해군을 갖추게 되었다. 2021년 현재 제 1/2차 연평해전과 같은 도발이 발생하게 된다면 북한 고속정 함대가 사거리 23km 이상인 mk.45 127mm 함포, 사거리 180 km인 해성 함대함 미사일, CIWS 등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소멸될 가능성이 높다. 또, 그동안은 북한의 실크웜 미사일, 해안포 등으로 인해 퇴각하는 북한 해군에 대한 반격을 실시할 수 없었지만, 아음속 함대함 미사일에 대한 동시 요격능력이 4발 이상인 KDX-2/대구급 호위함, 15발 이상인 KDX-3/ FFX-3 이지스 호위함 등 방공능력이 걸출한 최첨단 구축함/호위함들의 도입으로 인해 북한의 실크웜과 같은 유물은 쉽게 무시하고 대응사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연평해전에 참전했던 실 군함이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건 참수리 357호정을 복제한 모형이다.
당시 소령이었으며 현재는 중령.
당시 소령이었으며 현재는 중장. 합참군사지원본부장으로 재임중.
당시 대위, 추서 계급은 소령.
영화에서는 '최윤정 대위'라는 여성으로 묘사되었다.
당시 중위였으며 현재는 전역 후 국가보훈부 차관 역임중. 당시 북한군의 선제 발포로 인해 전사한 윤영하 대위를 대신하여 357 대원들을 지휘하였다.
NLL을 넘어서 한국 영해로 침범한 북한을 저지하여 격퇴시켰고 병력 교환비 면에서는 북측 피해가 더 크므로 전체적으로 봤을 때 대한민국 해군의 승리다.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발표도 역시 대한민국 해군의 승리다. 다만 장비 교환비에선 소형 연안경비정 단 2척에게 사실상 대전기 호위구축함 수준으로 체급과 전투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초계함 2척을 포함한 8척을 긴급히 동원했으면서도 그 중 경비정인 참수리 357정 1척을 격침당하고, 끝내 북측함정을 한 척 대파만 시켰을 뿐 단 한 척도 확실히 격침시키지 못한 한국 해군 수상함대가 손해를 봤다.
북한 해군 서해함대 8전대 산하 7편대 소속이다. S•O-1급 PCF(중소형 고속초계정) 당시 무장은 ZIS-S-53 85mm 전차포, M-1939 37mm 2연장 고사포, ZPU-4 14.5mm 4연장 고사총이다.
북한 해군 서해함대 8전대 5편대 소속이다. 상하이-2급 PCS(소형 고속경비정), 참수리보다 크기가 조금 더 작다. 그다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접적인 합세보단 인양선 역할을 해 주었다고 뉴스에서 언급했다.
편대는 3척 단위지만 평시 초계 때는 기함을 포함 2척이 작전하고 1척은 예비로 빠져 어선 대피 지도 등을 맡는다.
아직도 북한 육군이 후방에서 굴리고 있는 T-34-85 전차에서 주포만 떼어다 개량하고 해군용 포탑을 따로 제작하여 경비정에 단 것이다. 함포와 전차포의 포탑 유압 구동 체계가 세부적인 설계 등에서 T-34-85 전차와는 다르기 때문에 포만 개량하여 떼어다 붙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포탑 자체를 함포로 개조하여 장착한 모습이 포착되었다.
전사하기 전 "엎드려!"와 "쏘란 말이야...!"라고 명령했다고 한 중위가 2002년 뉴스에서 증언했다.
해군에서는 배의 부지휘관을 부함장, 부정장 등이 아닌 부장이라고 한다. 줄임말이 아니라 공식 용어다.
시크릿파일 서해전쟁의 출처에 따르면 인양하면서 수거된 357호정의 포탄은 탑재량과 일치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뉴스와 제2연평해전 참전자들 중 이희완 중령이나 다른 언론보도 및 탄약 검사 및 수거에 참여한 증언에 따르면 357호정은 장전된 포탄들을 거의 다 소모했거나 남아 있는 실탄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각 포대에 장전된 1132발 중 40mm 보포스 중구경 단장기관포 6발, 시 발칸 674발 도합 680발을 발사했다. 즉 반 이상 발사했단 얘기다. 실제로 사격은 12분에서 20여분 가량 진행되었다고 승조원 한정길 중사에 의해 밝혀졌다.
사실 해군 수병 및 부사관, 장교들은 평소 주어진 직책과 병과뿐만 아니라 각자 해상 전투 및 교전 혹은 비상 상황 발생 시 각자가 부여받은 특수 직별이 있는데 서후원 중사는 전투 상황시 정해진 특수 직별은 함정 갑판 62포 포방패에 거치된 M60 기관총 담당 부사수로, 병기부사관이었다.
해군에선 개인 화기를 소병기라 부른다.
해군에선 수병들은 계급이 앞에 오게 부르는 경우가 아니면 "XXX 병장"이나 "000 일병님"으로 부르지 않고 "XXX 수병", "000 수병님" 등으로 부른다. 이름 없이 대명사로 부를 때도 계급이 아니라 "거기 가는 수병, 이름이 뭔가?" 하는 식이다.
사실 서후원 중사가 전사한 62포 거치대의 좌측 우상단에 생긴 관통공은 3cm 정도로, 이 정도 크기의 관통공을 낼 수 있는 물건은 사실 78식 저격보총밖에 없다. 정장 윤영하 소령을 저격하고 추가 목표 물색 중 하필이면 철판이 굉장히 얇단 점을 포착하고 그를 포착한 저격수에 의해 철판 관통사격을 당한 것. 가슴에는 3cm짜리 구멍과 등에는 10cm 크기의 관통공이 있었던 것을 보아 저격수가 유력하다.
실제로 뉴스나 회고록 등의 보도 내용에선 전투 초반 2~3분쯤에 등산곶 684호정의 포탑이 전부 파괴되고 장전 탄약 등이 폭발하거나 불량 상태가 되어 쓸 수 없게 되고 7호 발사관과 73식 대대기관총, 88식 보총과 저격용 모신나강 같은 소병기 공격만 주고받았다고 한다.
윤영하 대위, 조천형 하사, 황도현 하사, 서후원 하사
한상국 중사(진)
SSU 대원들에 의하면 이때 한 상사가 자신의 손을 조타키에 끈으로 묶어 놓았던 상태여서 시신을 빼내는데 꽤 애먹었다고 한다. 그래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357정을 어떻게든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한 상사의 의지가 드러났던 순간이었다.
이후 인양 작업을 통해 인양되었고 복원 작업을 거쳐 평택의 해군 제2함대사령부 내부의 안보 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전쟁기념관 야외 전시관에도 있는데 이건 1:1 크기의 복제품이다. 우크라이나에 고철로 팔았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루머가 있는데 절대 아니다. 현재도 평택 2함대를 방문하면 참수리 357정과 천안함을 볼 수 있다. 전투 중에 가라앉는 경우뿐 아니라 전투 후 복구 불가능할 정도의 심대한 전투피해로 인한 침수 과다로 침몰하는 것 역시 격침에 해당하며 본 참수리 357정도 세계 전사상의 다른 격침 사례들 대부분과 동일한 전철을 밟으며 가라앉았으므로 결론적으로는 격침당한 것이다. 따라서 본 항목에도 격침으로 기재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전투 중 격침당한 군함을 격침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가라앉았다"고만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마치 전투 외의 이유로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줄 가능성이 있으며 격침당한 함정의 승조원들에게도 싸우다가 격침당한 자기 함정에게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다. 전투에 참가한다는 것은 설사 거기서 죽거나, 격파당하거나, 격추되거나 격침되거나, 살더라도 PTSD와 같은 후유증을 겪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날 하루에 살아 온 한평생 세월과 앞으로 살아가려고 했던 모든 미래, 나아가 그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모조리 걸고 맞서 싸움으로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 전장으로 향하게 되는 군인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것을 걸만큼 아주 큰 가치가 있고 승패의 여부와 관계 없이 그만큼 명예로운 일인데 거기다 대고 전투 외의 이유로 배를 잃은 것마냥 단순히 가라앉았다고만 하는 것은 그 배에 타고 있었던 전사자들과 생존 군인들, 전사자의 유족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킬 뿐인 언행으로 보일수도 있다. 따라서 격침된 함정이 거론되는 부분에서 함부로 그냥 단순히 "가라앉았다"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격침된 참수리 357정의 전사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앞으로는 분명히 자제해야 할 것이다.
소련이 보포스 40mm 포를 기반으로 설계한 두 화포구경들 중 하나로, 구경이 40mm보다 조금 작다. 다른 하나는 45mm 대전차포, 대공포 및 항공기용 대전차기관포 정도.
이준(李俊) 국방장관이 26일 국회 국방위에 보고한 자료.
안타깝게도 사건으로부터 15일 전 포르투갈전 당시 승리를 축하하는 뉴스 인터뷰에 참석했었다. MBC 뉴스에도 그의 생전 인터뷰가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 장면들은 모두 영화 연평해전에서 나왔다.)
한상국 상사는 2015년 7월 10일, 조천형 상사는 2021년 10월 15일 각각 상사 계급 추서.
한상국 상사는 진급을 이틀 앞둔 시점에서 전사하여 중사로 추서되었지만 2015년 7월에 2함대사령부가 추서진급심사위원회를 열어 한상국 당시 중사(진)의 전사일을 실종 후 시신을 수습한 2002년 8월 9일로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중사에서 상사로 최종 추서되었다. 이후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김성찬 의원이 발의한 '전사 순직한 진급예정자의 진급에 관한 법률안'에 따라 진급예정자가 전사 또는 순직하였을 때 진급예정인 계급의 윗 단계 계급으로 추서할 수 있게 되었다. 조천형 상사도 당시 6개월 뒤 진급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법을 적용하여 상사로 진급했어야 했는데 전사 후 오랫동안 계급이 중사(진)이 아닌 하사로만 알려져 있어서 추서되지 못하고 있다가 19년이 지난 2021년이 되어서야 누락이 확인되어 상사 최종 추서되었다.
수병 출신으로 진해기지사령부 의장병으로 근무하다 신분전환했다. 아내와도 수병 시절에 만났다고 한다.
158기라고 나와 있는 정보는 잘못된 정보이며 실제 조 중사는 1998년 8월 해군부후 173기로 임관하였다.
교전 당시 생후 4개월이었던 조시은이 2023년 2월 10일부로 학군단에 입단하여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임관은 2025년 3월 예정
전사자 중 유일한 병사다. 참고로 박동혁 병장은 전투 중에 입은 중상 때문에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되어 84일간 투병하다가 전사하였는데 이는 영화에서도 나온다. 이후 6용사를 기리기 위해 유도탄고속함 1~6번함엔 이들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이들이 생전 근무하던 2함대에 배치되어 있다. 그 중 윤영하급 유도탄고속함인 PKG 717은 박동혁함으로 명명되었다. 박동혁함은 대한민국 최초로 병사의 이름이 붙은 군함이다.
하필이면 해당 권호에 김정일의 음란성과 숙청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북한 해군에선 수병을 해병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배가 작아도 정장이 아니라 함장으로 통일하여 부른다.
나진급은 사실상 북한 해군의 소형 경비정 전대의 유일한 기함이자 거의 유일한 크리박, 남포급을 제외하면 함대에서 활동중인 대형함이기 때문에 사실상 소형 호위구축함 취급받는다.
사실상 북한에선 215t급 중형 경비정도 경비함 취급인 듯하다. 참고로 대한민국 해군의 함정 구별 기준은 배수량 500톤을 기준으로 하기에 해당 배수량급의 함정은 정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500톤 미만의 함정도 함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상술한 정장을 함장으로 부르는 것도 고려하면 북한군은 함정 구분이 없고 함으로 통일한 듯하다.
북한 어선단 상당수는 해군이 직접 관리하는 데다가 가끔 승조원들 중 정찰국 요원들이 섞여 타기도 한다.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데 오해가 없도록 먼저 확실히 말해 두지만 교전규칙의 내용을 떠나서 1953년 정전협정을 맺은 후 오늘날까지도 "공식적"으로는 한국군은 육해공 어느 곳에서도 북한군에게 아무 이유 없이 혹은 경고 없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할 수도 없고 그러한 허가도 나지 않는다. 이것을 명심해 두자. 이승만, 박정희 정권 뿐만 아니라 이후의 그 어떤 정권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대한민국은 제2, 제3의 6.25 전쟁을 여러 번 반복했을 것이다.
그냥 대한민국 영토, 대한민국 영해, 대한민국 영공에서 북한군이 눈에 보이기만 해도 경고도 없이 바로 쏴 버릴 수만 있다면 상대방이 나에게 총을 쐈다면 나는 항공기로 폭격을 할 수 있다면 참 편리할 것이지만 그렇게 한다면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소리다. 이러한 교전수칙은 지상과 바다, 그리고 하늘에서 조금씩 다른 내용으로 적용되고는 있지만 위에서 말한 수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큰 차이는 없으나 자료에 따라 '경고방송 → 차단기동 → 경고사격 → 위협사격 → 격파사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사실 제2연평해전만 그런 게 아니라 이전까지 쭉 이러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는 제2연평해전 당시로만 국한될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국군 방송선 피랍 사건 당시 신문 기사 내용이다. 눈앞에서 대한민국 해군 방송선을 북한 해군이 잡아가고 있는데도 해군, 공군도 공격하지 못한 사건이다. 신문 속의 "UN군사령부에 속해 있는 작전 지휘권"과 "교전규칙" 을 주목하자. 제2연평해전 이전인 1970년에도 이랬다.
혹은 이후. 신문기사에 따라 직전과 직후가 엇갈리고 있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닐 것이다.
월간조선 2002년 8월호
이 논란이 되는 선제 사격 금지 조항은 위에서도 본 것처럼 제1연평해전 이전, 더 나아가 1994년 평시 작전 지휘권 환수 이전부터 계속 존재했다. 일례로 1970년 국군 방송선 납치 사건 당시에도 대한민국 공군기들은 같은 이유로 인해서 공격을 하지 못했다. 뉴스 검색을 해 보아도 그 수많은 북한의 NLL 침범 과정 중 대한민국 해군이 북한의 경비정 등 전투함에 대해 남하를 저지할 목적으로 선제 사격한 경우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원 불상(=간첩선)의 선박에 대해 지상에 있는 초소가 선제 경고 사격하거나 간첩선 내지 반잠수정 등이 북으로 도망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선제 경고 사격한 사례는 있다. 작전 예규, 지침 등은 기밀이므로 자세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이전부터 NLL을 통해 남하하는 북한 수상전투함정에 대해 남하 저지를 목적으로 선제 경고 사격을 실시한 사례가 없다.
"...새해가 밝아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픔은 더욱 간절했다. 한국주둔 미 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박동혁 병장 어머니의 편지)
그래서 당시 나온 기사들을 보면 '아무개 장병이 부모 아무개 씨를 통해 ~라고 전했다'는 식으로 쓰여 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기자들이 궁여지책으로 가족들을 취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 와중에 거짓으로 가족인 척 행세하고 들어가서 천안함 생존장병들에게 이것저것 묻다가 쫓겨난 인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양심은 있었는지 또는 욕먹기 싫었는지 기사화를 하지는 않아서 8년 후에야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의 인물이 쓴 반성문 여담으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발생 직후에도 똑같은 짓을 한 기레기들이 있었다.
대신 2016년 서해수호의 날을 만들어 거기에 참석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울진군 무장 공비 사건때 합동 분향소에 직접 가서 유가족을 위로한 전례가 있다. 공비 소탕 작전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전에 워싱턴 포스트는 대한민국 정부가 8강 스페인전을 대북 심리전에 썼다고 했으며 대한민국 경기를 제외하고 이례적으로 월드컵 경기를 북한 주민들에게 방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북한이 3위·4위전을 노렸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게 한다.
북한의 월드컵 훼방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여전히 안전하지 않은 국가라는 것을 보여주게 되면 투자 불확실성으로 인한 경제 문제 유발 가능 / 국가 원수 간 약속을 깸 → 외교 결례 등.
이를 주장하는 측은 천안함 피격 사건 때는 유감 통지는커녕 사과 비슷한 것도 없었다는 것을 근거로 들며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서부전선 포격 사건에서 북한의 유감 표명에 대해 당시 새누리당(현재 국민의힘)측은 이를 사과라고 인정한 바가 있다. 유감이라는 표현이 사과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근거다.
그러나 분단 이후 북한의 숱한 대남도발과 관련하여 명백한 사과 표명은 한 차례도 없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나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때도 북한의 사과는 명시적으로 '사과'란 표현을 쓰지 않고 '유감'이란 표현을 썼다. 그리고 전자는 미국이 사과라고 인정했고 후자도 박근혜 정부는 사과를 받았다고 인정했다. 전자는 3차대전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후자는 목함지뢰 사용 자체는 문제였지만 인명사고 자체는 고의로 보기 힘든 면도 있었다고 해도 출입구에 지뢰를 심었지만 인명사고는 노리지 않았다는 건 설득력이 부족하며 먼저 남한 영토에 포격을 때린 건 빼도박도 못하는 도발이다. 판문점 도끼만행은 중국과 소련도 북한을 도와줄 생각을 못했다.
미국의 격앙된 반응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고려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9.11 테러가 발생한 지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미국인들의 테러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조지 W. 부시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으며 다음 해 1월 29일에는 이란, 이라크,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목한 '악의 축' 발언을 하는 등 냉전 이후 초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쳤다. 제2연평해전은 '악의 축' 발언으로부터 고작 4개월 지난 시점에 북한이 벌인 무력 도발이었으니 미국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와중에 '테러와의 전쟁'과는 거리가 먼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는 미국의 성에 찰 리가 없었다. 딱히 미국이 한국 국방을 한국 정부보다 신경 써 줘서 그런 게 아니다. 그렇지만 정부가 교전 상황까지 간 사건에 그런 의도가 없는 타국의 반응보다 더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은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이는 함선 노후나 초동 대응 부실, 지휘관의 과실 등 국가의 잘못들을 포함한다.
이는 후에 일어난 대한민국 초유의 사태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되는데 박정희 정부가 1972년 국민투표로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근간인 유신헌법을 통해서 사법부의 독립성을 박탈해 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게 그 유명한 사법 파동이다.
불편한 몸임에도 해군에 남기로 결정해 현재 중령으로 복무 중이다.
한 상사의 시신은 찾았다고 한다.
이 이유로 인하여 윤영하급은 대한민국 해군에 있어서 진보적인 기술 영입도 많았으며 이로 인한 사업적인 차질이 나타났고 체적도 상승하여 기존 예상보다 가격도 오르게 되었다.
링크된 영상 전체가 안보영화 그날은 아니고 그날의 전투 장면 부분만 잘라 온 영상이다. 그날은 여기자가 편집장에게 제2연평해전을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고 참전자들의 유가족들을 찾아보고 행적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는 걸로 시작된다.
함정과 육상 근무자의 수당과 진급 점수 차이는 매우 크다. 평생 독신으로 살 사람이면 장기 선발만 통과하면 그냥 편한 육상만 전전해도 별 문제 없지만 부양할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는 빠른 승진으로 인한 보다 높은 급여와 함정 승조로 인한 수당 등을 포기하기 힘들다.
이렇다고 해서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 주는 것도 아니고 먼저 스스로 신청을 해야 한다. 죽은 사람들은 당연히 유족이 신청해야 한다. 즉 가족이 없는 사람은 설령 나라 위해 싸우다 죽는다고 해도 나라에서 알아주지 않고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것이었다. 천안함 전사자 중 문영욱 중사가 이런 사례로, 부모도 형제도 없고 배우자도 자식도 없던 사람이어서 (국가에서 주는 훈장은 똑같이 받았지만) 유공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문 중사가 아예 사고무친인 무연고 사망자는 아니었고 친척은 있었던 사람임에도 당시 법률은 직계가족만 신청자격이 있었기에 친척들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2016년 신청자가 없는 사람을 직권으로 유공자로 인정하는 제도가 생기면서 달라졌고 문 중사도 전사한 지 8년이 지난 2018년에야 뒤늦게 인정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제2연평해전 생존장병도 마찬가지로, 신청자 전원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되는 데는 전투 이후 장장 20년이 걸렸다. 2022년에야 실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