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문화유적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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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문화유적 표석

1) 돈의문 터(敦義門址)

속칭 서대문(西大門)으로 불리우는 이 문은 서울성곽의 4대문 중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 문은 조선시대 5백년간 중국과 통하는 의주로(義州路)의 관문(關門)으로 지금의 고려병원과 경향신문사옥이 있는 「신문로」 마루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태조 5년(1396)에 약 45리의 서울성곽을 쌓고 인마(人馬)가 출입하는 성문을 낼 때 돈의문은 「종로」와 일직선상에 있는 지금의 경희궁 터의 서쪽 담장에 만들고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

그 후 세종 4년(1422) 2월에 서울성곽, 즉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지점에 서대문을 새로 세움으로써 사람들이 흔히 ‘새문(新門)’이라 불렀다. 옛 문헌에 따르면 서전문은 동대문과 같이 옹성(甕城)으로 축조되어 있었다. 이로써 동대문에서 종로, 서대문까지 직선이었던 대로는 ‘새문’이 세워지면서 현재 신문로 2가 파출소 부근에서 남서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이 문은 역사적으로 이 괄(李适)의 난 및 을미사변(乙未事變)과 연관이 있다.

인조 2년(1624) 1월,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 괄은 반란군을 이끌고 질풍처럼 남하하여 2월 10일 서대문으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 괄을 추격하여 온 장 만(張晩), 정충신(鄭忠信)이 거느린 정부군과 안산(무악)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쫓겨서 가까운 서대문으로 들어오려 하였지만 서울시민들이 닫아 버렸기 때문에 입성하지 못하였다. 이 괄은 할 수 없이 돌아서 남대문으로 입성하였다가 광희문으로 빠져 나가서 이천에 이르는 길에 부하의 손에 죽고 말았다.

조선말 청일전쟁에 이긴 일본은 친일정권을 형성하는데에 방해가 되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1895년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공덕동 아소정(我笑亭)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을 앞장 세워 일본 불량배들과 서대문 앞에서 만나 합류하였다. 새벽 5시경의 파루(罷漏)종이 울리면서 문이 열리자 곧바로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니 이는 서대문에 얽힌 망국(亡國)의 한이 아닐 수 없다.

돈의문은 일제 때인 1915년에 시구역개수계획(市區域改修計劃)이라는 명목으로 도로 확장을 할 때 일본인들에 의해 헐리고 말았다. 일제는 돈의문의 목재와 기와 및 석재를 경매하였는데 문루를 헐어 낼 때 그 속에서 불상과 기타 많은 보물이 나와서 이 문을 샀던 사람은 큰 횡재를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2) 소덕문 터(昭德門址)

속칭 서소문으로 불리우는 이 문은 서울성곽의 4소문 중의 하나로 남대문과 서대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이 문은 조선 5백년간 파주 ·고양 ·김포 방면으로 왕래하는 인마가 출입하는 작은 성문으로 「서소문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중앙일보사옥과 순화빌딩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이 문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한 후 태조 5년(1396) 9월에 서울성곽을 쌓고 성문을 낼 때 세워지면서 소덕문이라 명명하였다. 그런데 조선초 성종 3년(1472), 전왕인 예종(睿宗) 왕비 장순왕후의 시호(諡號)를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고 추존(追尊)하면서 ‘소덕’이란 명칭을 피하기 위하여 소의문(昭義門)이라고 새로 제정한 것이다.

서울의 4소문은 소의문 외에 광희문(光熙門), 혜화문(惠化門), 창의문(彰義門)이 있었지만 그 중 소의문과 혜화문은 일제 때 헐리어 없어졌으나 최근에 혜화문은 서울시에서 복원되었으며 서소문은 동명(洞名)으로만 남아있어 옛날을 회상케 하고 있다.

이 문은 건축 당시에는 성문과 문루(門樓)가 있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영조 19년(1743)에 금위영(禁衛營)에 명하여 이 해 8월에 복원하였다.

서소문, 즉 소의문은 광희문(일명 시구문,水口門)과 더불어 서울 장안의 백성들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시신(屍身)을 상여(喪輿)에 싣고 운구(運柩)하는 저승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은 반드시 이 두 문 중에서 한 문을 거쳐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상여는 4대문은 물론 창의문이나 혜화문 등의 소문도 통과할 수 없다는 금령(禁令) 때문에 아현(애고개)· 마포 ·용산 · 양화진 방면에 묘지를 잡게되면 서소문을 거쳐서 운구하였다.

한편 서소문 밖의 지금 서소문 공원 자리에는 백사장이 있어서 조선 5백년 동안 중죄인을 공개로 처형하는 사형장이 있어서 참터(斬址)라고 하였다.

특히 흥선대원군 집권하고 있었던 1866년에 천주교인을 학살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남종삼 등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 곳에서 처형되었으므로 지금 서소문공원 안에는 천주교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갑신정변(1884)이 3일 천하로 끝나자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개화파 인물들은 체포되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3)홍화문 터(弘化門址)




속칭 동소문으로 불리우는 이 문은 서울성곽 4소문 중의 하나로 동대문과 숙정문 사이에 위치하였다.

이 문은 북쪽의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으므로 함경도 등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의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혜화동로타리에서 동소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자리하였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태조 5년(1396)에 서울성곽을 축조하고 성문을 낼 때 홍화문이란 명칭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도성 동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불렀는데 조선 초 성종 14년(1483)에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동문(同門)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명명하였으므로 동소문과 혼동되므로 중종 6년(1511)에 동소문을 혜화문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조선 초에는 북방의 여진족 사신의 숙소가 동대문 옆 지금의 이화여대 부속병원 자리에 북평관(北平館)이 있었지만 서울에 출입할 때는 반드시 이 문을 이용하도록 하였으므로 규모가 큰 문루가 있어 위용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청(淸)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이 전일의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던 서대문으로 바뀌면서부터 문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문루(門樓)가 무너지고 성문만 남아있게 되었다.

조선 후기 영조 20년(1744)에 어영청(御營廳)에 하명하여 무너진 문루를 복원하게 하고 당시의 명필인 조강이(趙江履)가 ‘혜화문’이라고 쓴 현판도 새로 달았다. 그런데 이 문의 문루의 천정에는 봉황(鳳凰)을 채색으로 그린 것이 특색이었다. 그 이유는 이 문 밖 지금의 동소문동,삼선동,동선동 일대에 새가 많아 농사에 피해가 컸으므로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는 것이다.

조선왕조 5백년간 의연히 서 있던 혜화문은 일제 때 도시계획이라는 이름과 건물이 퇴색하였다는 구실을 붙여 1928년에 문루를 헐어냈고, 1939년에 돈암동행 전차(電車)를 부설하면서 돌로된 아아치 성문마저 헐어 버려 최근까지 혜화동, 동소문동이라는 동명(洞名)만 전해왔다.

그런데 혜화문은 1994년말까지 서울시에서 혜화동고개 옆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4) 남소문(南小門)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 즉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버티고개’에 있었던 남소문은 서울성곽 4소문 중의 하나로 조선 초 세조 3년(1457)에 세워졌다.

현재 중구 광희동에 남아있는 광희문(光熙門)은 조선 초 태조 5년(1396)에 서울성곽을 쌓을 때 축조된 것으로 남소문에 해당되지만 속칭 시구문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는 하나 남소문이라고는 칭하지 않는다.

조선 초에 도성에서 한강나루(한남동)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해서 가는데 거리가 멀어 불편하므로 한강나루터를 도성에서 곧바로 통과하여 나갈 수 있는 문을 새로 설치하자는 건의가 있어 남소문을 새로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은 설치된지 12년만인 예종 1년(1469)에 지경연사 임원준(知經筵事 任元濬) 등이 수레 등이 다닐 수 없으므로 실용성이 없고, 음양가(陰陽家)들이 서울의 남동쪽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고 주장하자 예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폐쇄하게 되었다. 즉 이 시대에 풍수사상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서울의 남동쪽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는 예는 남소문을 건축한 직후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났고, 또 하나는 남소문을 열어 놓으면 도성 안의 여자의 음행(淫行)이 많아진다는 속설이 있어서 꺼렸던 것이다.

그 후 이 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명종과 숙종 때에 여러 차례 제기되어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풍수사상에 의한 반대에 부딪혀 개통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남소문은 비록 폐쇄는 하였으나 조선 말까지 존속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일제 때 주초(柱礎)마저 없어졌다.

예종 때 남소문이 폐쇄되기 직전 이 곳에는 이른바 떼강도가 출현하여 남소문을 수비하는 군사 2명을 살해하고 수문장을 협박한 외에 약탈해 간 ‘남소문적도사건(南小門賊徒事件)’이 발생하였다. 예종은 크게 놀라 이를 중대시하여 형조에게 명하여 범인들을 체포하게 한 뒤 승정원으로 하여금 엄히 국문(鞠問)하게 한 끝에 혐의자 20여명 중 4명이 장살(杖殺)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명종 때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주장을 했던 사람들은 이 문이 막힌 관계로 도적들이 낮에 이 부근에 숨었다가 밤이되면 성벽을 넘어 도둑질을 하는 것이니 이 문을 열어 피해를 줄이자고 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에는 붕당정치가 심화되었던 관계로 정권 획득을 위해 남인(南人)들이 문을 개통하자고 한데 반하여 서인(西人)들은 이를 반대하였던 것도 이채롭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계속 북상하여 서울이 위험해 지자 선조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으로 하여금 한남동 강변의 제천정(濟川亭)을 진지로 삼아 한강을 사수하게 하였으나 이 당시 도성에서 가까운 남소문이 폐쇄된 관계로 도성에서 군사작전을 위한 교통로는 남대문이나 광희문(시구문)으로 통하는 수 밖에 없었던 까닭에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하고 서울을 왜군에게 내어준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5) 수표교 터(水標橋址)




조선 초 태종~성종 때 청계천 위에 놓여진 이 돌다리는 장안의 명물로서 1959년까지 종로구 관수동 20번지와 중구 수표동 43번지 사이에 있었다.

이 다리는 원래 마전교(馬廛橋)로 불리었다. 그런데 홍수 때를 대비하여 청계천 수위(水位)를 재기 위한 수표(水標)를 세워 놓았으므로 수표교라고 불리어진 것이다.

1957년부터 서울시가 청계천 복개 공사를 하게 되면서 다리를 매몰하거나 철거가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청계천의 여러 다리 중에서도 특별히 수표교는 훼손할 수 없다는 여론에 부응하여 일시 홍제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965년에 현재 장충동공원으로 다시 옮겨 놓았으며 1973년 6월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이 당시 수표교 서쪽에 세워졌던 수표석(水標石;보물 제838호)은 영조 36년(1760)에 재건된 것인데 장충단공원으로 옮겼다가 청량리동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다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조선 초 한양 천도 후 처음부터 이 곳에 돌다리를 가설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태종 6년(1406)에 인공으로 물길을 뚫어 만든 개천 위에는 돌다리 7개가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당시 수표교가 가설된 것으로 보인다. 한양 천도 후 이 곳 부근에 소와 말을 팔고 사던 우마시전(牛馬市廛)이 있어서 마전교라고 불리우다가 세종 23년(1441)에 두개로 된 부석(趺石) 위에 칫수를 새겨 놓은 나무 기둥을 끼워 세운 목제(木製) 수표를 세운 뒤로부터 수표교로 고쳐 불리워진 것이다.

폭 7.5m, 높이가 4m, 길이 27m의 수표교는 돌로 되었지만 멀리서 보면 마치 목재를 사용한 다리처럼 보인다. 사용한 돌은 화강암이고 다리 기둥은 모두 45개가 여섯모졌으며 그 위에 길게 모진 시렁(桁)을 걸쳐 놓고 시렁 사이에 돌을 깔아서 다리를 세웠다.

양편 가에는 돌난간도 달아서 구조가 매우 치밀하면서 아름답다. 그리고 이 다리 서쪽 시렁 측면에는 ‘정해개조(丁亥改造)’와 ‘무자금영개조(戊子禁營改造)’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5백년 동안 여러차례에 걸쳐 수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청계천은 오랫동안 쌓인 모래 때문에 하상(河床)이 높아짐으로써 장마철이 되면 홍수가 나서 서울의 수해(水害)가 심하였다. 이에 영조 36년(1760) 2월 청계천 준설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기 위하여 20여만명의 군대와 민정을 동원하여 57일 동안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수표교 아래에 높이 10척의 수표석을 새로 만들고 돌기둥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이란 네 글자를 새겨서 준설의 표준을 삼고 평지 수위(水位)를 알게 하였다.

즉 이 다리는 청계천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한 수량(水量)을 재는 역할도 하였던 중요한 다리였다.

이 다리는 청계천의 여러 다리 중에서 국왕의 행차가 자주 있었다. 현재 저동2가 중부경찰서가 위치한 곳에는 태조 등 여러 왕들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이 있어서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짓날, 납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거둥하였다.

수표교는 조선 초 중종 때부터 정월 대보름날 밤에 서울시민들이 다리밟기(踏橋)를 하던 대표적인 다리였다. 즉 이 날 12개 다리를 밟으면 12달 내내 재앙을 막고 각기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어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리를 밟았는데 이 날은 통행금지마저 해제되어 늦게까지 사람들이 붐비었다. 이에 남녀 풍기가 문란하다고 하여 명종은 한 때 답교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수표교에는 답교놀이와 관련되어 선조 때 갓 장가든 동악 이안눌(李安訥)이 답교놀이에 어울렸다가 술이 너무 취해 수표교 부근에 쓰러져 있었는데 다른 집 신랑을 찾으러 나온 신부집 하인들이 착각하여 이안눌을 신방(新房)에 뉘었던 일화가 있다.

또한 정월 대보름날 전 2~3일에는 수표교를 중심한 청계천 아래 위에서 연싸움이 벌어져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싸움하는 날이면 서울 시전상인들도 가게문을 닫고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6) 광혜원 터(光惠院址)




현재 헌법재판소가 자리한 종로구 재동 83번지에는 1989년까지 창덕여자고등학교가 있었고 이 학교 기숙사 자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왕립(王立) 광혜원(廣惠院)이 있었다.

조선 초부터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던 동․서 활인원(東․西活人院)과 약을 지급하던 혜민국(惠民局)이 폐쇄되었으므로 고종 22년(1885) 4월 10일 광혜원이 이 업무를 맡게 되었다.

광혜원이 설립된 계기는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게 자상(刺傷)을 입은 민씨일파의 거물 민영익(閔泳翊)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즉 민영익이 칼에 맞아 중상을 입어 사경(死境)을 헤맬 때 미국공사가 추천한 북장로회 파견 선교의사(宣敎醫師) 알렌(安連, H. N. Allen)의 치료를 받아 완쾌되었다.

그러자 알렌박사는 서양의술을 완전히 신봉하게 된 민영익대감을 앞세워 광혜원 설치를 고종에게 적극 건의했다.

이에 따라 알렌박사는 광혜원의 원장을 맡게되어 본격적인 서양식 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당시 서울 장안에는 노랑머리에 파란눈의 서양사람이 두 귀에 고무줄을 꽂고 가슴을 대보면서 주사를 놓아 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돌아 하루 최고 260명의 환자가 몰려들어 이들을 진료하기도 하였다.

한편 고종은 2주일 뒤인 4월 23일, 백성들의 치료에 공이 크다고 하여 광혜원을 제중원(濟衆院)으로 고치고 이 병원은 통리교섭아문(統理交涉衙文)안에 두도록 했다. 그러나 이 병원을 찾는 환자가 너무 많은데 비해 제중원이 너무 비좁아 이를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개업 2년 뒤에 구리개(銅峴)로 이전하였다.

그 뒤 제중원이 국가재정의 궁핍으로 지원이 줄어들자 운영난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제중원의 관제를 폐지하게되었으므로 미국 북장로회의 후원으로 운영해 나갔다. 제중원은 광무 8년(1904) 9월에 남대문 밖 용산구 도동(挑洞)에 병원을 세워 세브란스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 병원에서는 황해도, 평안도에서 13세부터 16세까지의 총명한 기생 2, 3명을 뽑아 병설(倂設) 여의원(女醫院)에서 의술을 익히게 했다.

한편 광혜원이 세워진 현재 헌법재판소 자리는 영조 때 조상경(趙尙絅) 판서가 살기 시작한 후 대대로 풍양조씨가 살았다. 조대비(趙大妃)도 이곳에서 거처했다

그 후 이 집에는 고종 때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朴珪壽)가 살았다.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서 개화사상의 선구자인 박규수는 그의 사랑방에서 김옥균, 박영효, 홍역식, 서광범, 김윤식, 서재필, 유길준, 박영교 등 젊은이에게 평등사상과 근대 개화사상을 가르쳤다. 이리하여 헌법재판소 자리를 「개화사상 발생지」로 일컫고 있다. 박규수 정승이 살던 중사랑(中舍廊) 뜰에는 600년된 백송(白松)이 있었는데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7) 독립신문사 터(獨立新聞社址)




정동제일교회 남쪽의 배재공원은 배재고등학교가 자리하던 곳으로 이 공원의 일부 지역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民間紙) 「독립신문」 사옥이 있었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徐載弼)선생이 11년만에 귀국하여 정치보다는 민중 계몽을 위한 신문 발간에 뜻을 둠에 따라 창간된 것이다. 서재필선생이  신문 발행을 결심하자 김홍집 내각은 이를 후원하기로 약속하여 신문 발간 준비를 하게되었다. 아관파천(1896) 후에도 박정양 내각이 계속 신문 발간을 지원함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인쇄기와 활자를 구입하고 정동에 있는 국가 소유의 건물을 빌려 사옥으로 삼았다.

「독립신문」은 「한성순보」가 사라진지 7년 8개월만인 건양 1년(1896) 4월 7일에 창간되었는데 가로 22cm, 세로 33cm의 3단제(三段制) 4면 신문으로 주 3회(화· 목· 토요일)의 격일간지로 발행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1면부터 3면까지는 한글판이고 4면은 영문판으로 300부를 인쇄하였다. 그 이듬해 광무 1년(1897) 1월 1일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고 크기도 2배로 확대하여 발행하였다.

이 신문의 책임자는 서재필선생이고 부책임자는 주시경선생이었으며, 그 밑에 탐방원(探訪員)이라는 기자를 두었다. 신문 발행부수는 한글판이 1,500부까지, 영문판은 약 200부를 발행하였는데 그 당시 신문 1부를 많은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었으므로 독자층은 발행부수의 몇백배 정도로 추산된다.

광무 1년(1897) 7월 1일부터는 신문을 매일 발행하여 일간지가 되었는데 신문 논조(論調)가 친러파 정부를 비판하고 탐관오리를 서슴없이 공격하는 외에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 개입을 보도함에 따라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게되었다.

이로 인해 광무 2년(1898) 5월 14일 서재필선생이 국외로 떠나게 되자 윤치호가 주필을 맡아 계속 발간하고 독립협회의 기관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윤치호가 덕원부사 (德源府使) 겸 원산감리(元山監理)로 임명되자 아펜젤러, 엠벌리가 주필을 맡았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1899년 12월 4일자(제4권 제278호)로 폐간되었다.


8) 광문회관 터(光文會館址)




광문회관은 1910년에 최남선 등이 한국 고문헌의 보존과 보급, 고전 문화의 선양(宣揚)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국 고전간행단체인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자리했던 곳이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조선에서 해마다 진귀한 서적과 국보급 문화재를 반출해 나갔다. 이에 충격을 받고 민족 전통의 계승을 위한 고전 간행 및 그 보급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최남선·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등은 조선광문회를 조직하였다.

이리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귀중문서의 수집·편찬·개간을 통한 보존, 전파를 위하여 고문헌을 최단시일에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하여 인쇄하고, 가입회원에게는 실비로 배포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제1차로 역사서적인 ꡔ동국통감ꡕ · ꡔ동사강목ꡕ · ꡔ삼국사기ꡕ · ꡔ삼국유사ꡕ · ꡔ발해고ꡕ, 지리서적으로서 ꡔ택리지ꡕ · ꡔ산수경ꡕ, 민속서적으로 ꡔ동국세시기ꡕ, 국어학서적의 ꡔ훈몽자회ꡕ · ꡔ아언각비ꡕ, 고전으로 ꡔ용비어천가ꡕ · ꡔ산림경제ꡕ · ꡔ지봉유설ꡕ · ꡔ성호사설ꡕ · ꡔ열하일기ꡕ, 문집류로서 ꡔ율곡전서ꡕ · ꡔ이충무공전서ꡕ 등을 간행하였다.

조선광문회는 수사(修史) · 이언(理言) · 입학(立學)의 3대 기치 아래 180여종의 고전 간행을 계획하였으나 20종 밖에 간행하지 못하였다. 또한 주시경 등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을 편찬하려다가 여의치 않아 1927년 그 원고를 계명구락부로 넘겨주었다.

조선광문회의 활동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도 민족정신과 슬기가 담긴 고전을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한 공이 크다.




9) 충무공 이순신이 나신곳




명보극장 동쪽의 주택가,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는 조선시대에 마르내골(乾川洞)로 불리었는데 이 곳에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즐기는 등 무인의 기질이 있었다. 선조 9년(1576)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으로 재임시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였고, 임진왜란 전해인 선조 25년(1592)에 전라좌도수군절제사(全羅左道水軍節制使)에 임명되자 부임과 동시에 군졸을 철저히 훈련시키고 거북선 등 전선(戰船)을 만들며, 군비를 확충하여 다가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옥포 ·합포의 해전, 계속해서 6월에 당포, 당항포의 해전에서 승리하고, 7월에 한산도에서 왜선 40여척을 격파하는 등 대첩을 거두었다. 이어서 안골포, 부산, 마산의 왜군을 궤멸시켜 남해안 일대의 왜군을 소탕하여 10월에는 3도수군통제사를 겸하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모략으로 통제사에서 파직되어 하옥되었다가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의 수군이 거제에서 전멸함에 따라 다시 통제사로 기용되어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과 맞서 31척을 격파하는 명량대첩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11월, 노량(鷺梁)에서 퇴각하는 왜선 500여척을 공격하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중 충무공이 해전에서 거둔 승리의 의미는 군량미의 조달처였던 호남을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함으로써 육지에서의 왜군의 지속적인 북상을 저지한 결과 조선과 명(明)의 연합군이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충무공은 해전의 승리로 제해권을 장악하여 ‘풍전 등화(風前燈火)’의 국가의 사직(社稷)을 지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란 중에 ꡔ난중일기(亂中日記)ꡕ를 써서 남겼고, 우국충절의 시를 여러편 남겨 놓았으며 겨레의 성웅(聖雄)으로 추앙되어 세종로 네거리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10) 서울대학교 터




종로구 동숭동 1번지 3호의 문예진흥원이 자리한 일대는 국립 서울대학교가 30여년간 있었다.

광복 후 미군정에 의하여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에 의거 서울 및 그 근교의 공사립 고등교육기관들을 통합, 개편하도록 함에 따라 문리과대학·법과대학·공과대학·의과대학·농과대학·상과대학·치과대학·사범대학·예술대학 등 9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으로 편성된 종합대학교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이 국립대안(國立大案)은 많은 논란을 야기시켜 교육계의 논쟁이 격화되자 당시에 민족진영과 좌익진영의 대결로 비화되는 등 국대안반대운동(國大案反對運動)으로 정치적·사상적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최초의 국립 종합대학교로 발족된 서울대학교는 6·25전쟁으로 임시 수도 부산에 일시 피난하였다가 환도한 후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동숭동의 문예진흥원이 위치한 곳은 서울대학교 본부와 문리과대학·중앙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었고, 현재 이화동의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에는 법과대학·미술대학이 있었으며,「대학로」 건너편 연건동에는 의과대학 및 부속병원이 아직도 위치하고 있다.

현재 문예진흥원은 구 서울대학교 본관과 문리대 본관 건물을 청사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중 구 서울대학교 본관은 1981년 9월 25일에 사적 제278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일제 때인 1931 10월에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한국인 박길룡(朴吉龍)이 경성제국대학 본관으로 설계한 건축으로 철근 콘크리트 및 벽돌의 평지붕이고, 외장은 미색타일을 붙였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 492.5평 규모로서 건축양식은 근대합리주의적 형태이나 세련되고 우아한 모양이다.

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자리에는 수령(樹齡) 50년 이상의 마로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서울대학교의 역사를 상징하는 나무로 사랑을 받아와 이 일대를 마로니에공원으로 칭한다.

이 곳에 자리하던 서울대학교는 1975년에 관악구 신림동 1번지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해 갔으므로 그 터는 대부분 민간 주택지로 매각되었다. 이에 따라 학교 건물이 철거되고 상징적으로 서울대 본관과 문리대 본관 건물만 남겨두었다.




11) 세종대왕 나신곳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 일대는 조선 4대왕 세종(世宗; 1397~1450)의 탄생지이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장남 양녕대군이 세자(世子)에서 폐립되자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은 태조 6년(1497) 4월 10일에 한성부 북부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이 곳에는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자취를 찾을 수 없고, 이 일대의 도로에 접한 곳은 상가(商街)와 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세종이 탄생한 것은 한양 천도 직후여서 태종이 세자로 있었기 때문에 궁궐이 아닌 사저(私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곳을 세종의 탄생지로 고증한 것은 1956년 12월에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와 한글학회가 공동으로 답사를 한 결과 통인동 137번지 일대가 고지도(古地圖)에 의한 준수방의 위치와 지세(地勢)가 합치한 때문이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가의 전반적 기틀을 잡아나갔다. 현명하고 학문을 좋아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등 북변의 국경을 확정하여 역대 군주 중에서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 왕이다.

세종은 집현전을(集賢殿)을 설치함으로써 학문을 발전 시키고 방대한 편찬사업을 벌이게 되었으며, 제도를 정비하여 유교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측우기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 제작하였다.

세종 재위 때 우리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과 세종의 인간성이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배출되어 그를 보필하게 되었던 것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세종의 시호는 莊憲, 능호는 영릉(英陵)으로 처음에는 서초구 내곡동 산 1번지에 위치하였으나 예종 원년(1469)에 3월 6일 현재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천릉(遷陵)하였다.




12) 성삼문선생 살던곳




정독도서관 뒷편 종로구 화동 23번지 9호는 학자이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 1418~1456)과 그의 부친 성 승(成勝)이 살던 곳이다. 조선 말 순조 때까지도 선생이 심은 소나무가 뜰 안에 있어서 ‘성삼문수식송(成三問手植松)’이라는 석각이 있었는데 뒷사람이 잘라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현재 洪城)의 외가에서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났느냐?”하고 세번 묻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삼문(三問)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는 태종 18년(1418)에 태어나 세종 20년(1438)에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학사로 뽑혀 편찬사업에 참여하고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세종 28년(1446)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는 요동에 유배되어 있는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왕래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는 등 큰 공로가 있었다.

세종의 두터운 사랑을 받고 어린 단종의 보필을 당부받은 그는 단종 3년(1455)에 예방승지로서 세조가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했다. 이듬해 좌부승지로서 아버지 성승과 박팽년·유응부·이개·하위지·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세조의 불의를 나무랐다. 그가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한 후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에게 받은 녹(祿)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家財)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성삼문을 포함한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손꼽혀 왔으며 숙종 17년(1691)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뒷날 남효원(南孝溫)이 ꡔ추강집ꡕ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하여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절의(節義)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그의 묘는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묘역에 있고, 인근에 있었던 민절서원(愍節書院) 외에도 여러 곳에서 그를 모셔 제향하였다.




13) 장악원(掌樂院) 터




구리개로 불리우던 중구 을지로 2가 181번지,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는 조선시대 관아인 장악원이 있었다.

장악원은 6조(六曹) 중 예조(禮曹)에 속하여 예조에서 맡아하는 모든 궁중의식에 따른 음악과 무용을 제공하였다. 즉 궁중의식으로는 종묘, 문묘, 사직 등의 제례(祭禮)의식과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조회(朝會)하는 의식 그리고 궁중잔치인 연향(宴享),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대사객(待使客)의식이 있었다.

장악원은 장악서(掌樂署)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성종 1년(1470)에 이와같이 제정된 이래 국립음악기관의 명칭이 되었으나 시대에 따라 이원(梨園)·연방원(聯芳院) 등으로 불렸다. 원래 이 관아는 성종의 특명으로 한성부 서부 여경방, 태상시(太常寺) 동쪽의 민가를 철거하여 세웠는데 이 곳에는 넓은 뜰이 있어서 문무백관들이 음악에 맞추어 왕에게 조하(朝賀)하는 의식(儀式)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므로  이곳 구리개로 옮긴 것인데, ꡔ漢京識略ꡕ에 보면 풍수설(風水說)에 이 곳이 터가 세고 불길하므로 음악소리가 들려 나오면 사람들이 걱정 근심으로 생긴 답답한 마음을 풀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장악원을 세웠다는 것이다

조선 초 성종 때에는 장악원의 악공과 악생(樂生)이 971명을 두었으나 임진·병자란 이후에는 이를 줄여 641명이 되었다. 악공과 악생이 결원되면 전국 8도에 고르게 배정하여 충원하는데 악공은 노비, 무당의 자손에서 뽑고 악생은 상인(常人) 자식들 중에서 선발한 뒤 취재(取材)시험을 치러 합격시켰으며 그 중의 15명은 맹인(盲人)이 소속되어 있었다.

연산군 때에는 장악원에 관원을 증원하여 많은 기생과 악공(樂工)을 교육시켜 자신의 향락을 위한 기구로 운영하였으나 중종반정 후에 환원 시켰다.

조선말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군 1개 대대가 도성 내에 들어왔을 때 그 일부가 장악원의 악생들을 내쫓고 주둔하였고,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일본군이 장악함으로써 조동의 주택으로 옮겼다가 중림동의 장혜원 자리로 다시 이전하였다. 일제 때는 동양척식회사가 이 곳에 들어섰고, 광복 후에는 신한공사, 국방부, 보건부, 내무부가 사용하였다.




14) 선혜청 터(宣惠廳址)




선혜청은 남대문과 남대문시장 사이의 높은 지대인 중구 남창동 284번지 일대에 위치하였던 조선시대의 관아였다. 즉 전일의 인경궁(仁慶宮) 옛 터에 선혜청이 있었던 것이 서울 고지도에 나타난다. 선혜청이란 이름은 임진왜란 이후인 광해군 원년(1608)에 대동법(大同法)을 선혜법(宣惠法)이란 이름으로 경기도에 처음 시행하면서부터 일컫게 되었다.

선혜청은 대동법의 실시로 대동미(大同米)는 물론 균역법에 의한 군관포(軍官布)와 결작미(結作米) 및 어·염·선세(魚鹽船稅)의 출납을 맡아보던 재정기관이었다.

선혜청이 처음 설치될 때에는 물가조절과 진휼(賑恤)을 맡은 상평청(常平廳)의 업무와 경기도의 대동미를 취급하였으나 효종 3년(1652)에 충청도·강원도의 대동미까지 관장하다가 점차 각도(各道)의 대동미를 출납하게 되면서 조선 후기의 세입(歲入)의 대부분을 관장, 호조(戶曹)를 능가하는 새로운 재정기관이 되었다. 즉 비변사에서 관장하는 진휼청은 인조 4년(1626)에, 균역법의 시행으로 설치된 균역청도 영조 29년(1753)에 선혜청에 소속되었다.

효종 때 선혜청의 책임자는 영의정 등 세 정승이었으나 기구가 확대되면서 업무를 지휘, 감독하는 당상(堂上)을 두었다. 선혜청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대동미의 출납을 위하여 용산강에 별창(別倉)을, 북창(北倉)은 삼청동에, 동창(東倉)은 구 장용영(壯勇營)에 두었다가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한편 선혜청의 창고가 있어서 창동(倉洞)이라고 동명이 생겨났고 그 북쪽은 북창동, 그 남쪽은 남창동이라고 명명되었다.




15) 훈련원 터(訓練院址)




훈련원은 중구 을지로 6가와 방산동에 걸쳐 있던 조선시대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훈련 및 병서(兵書)·전진(戰陣)의 강습을 맡았던 관아였다.

1917년 6월까지도 훈련원(訓練院)이라고 쓴 현판이 기와집에 달려있었는데 이 곳에 국민학교를 신축하면서 기와집은 간호부양성소의 건물로 고쳐 졌다.

조선 건국 초에는 훈련관(訓練館)이라고 했으나 세조 12년(1466)에 훈련원으로 바뀌었다. 훈련원에서는 중요한 업무의 하나인 무과(武科)시험을 주관하는데 서울에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70명과 각 도에서 뽑힌 120명을 합한 190명을 병조(兵曹)와 함께 복시(覆試)를 치러 28명을 선발하고, 최종적으로 전시(殿試)를 보아 등수를 정하였다.

훈련원의 일화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 곳에서 별과(別科)시험을 볼 때 말을 달리다 실수하여 낙마하여 왼쪽 다리의 골절상을 당하였으나 다시 일어나 다리를 나무껍질로 묶은 다음 말을 다시 타고 달려서 등과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말 1907년에 한일신협약의 체결로 훈련원이 폐지되고 군대해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해 8월 1일 모든 한국군을 비무장으로 훈련원에 집합하게 하였다. 그러자 이를 분개한 시위대대 제1대대 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함에 장병들이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인 무장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16)균역청 터(均役廳址)




지금 「퇴계로」 큰길로 들어간 중구 남학동 1번지와 12번지 일대는 조선시대 관아인 균역청이 있었다.

균역청은 조선 후기 영조 26년(1750)에 창설된 병역세(兵役稅)를 관장하던 관아이다.  영조(英祖)는 이제까지 양민(良民)들이 부담하던 군역(軍役)이 과중하다고 판단하여 그 대책으로서 매년 베(布) 2필씩 내던 것을 1필로 줄였다. 그 대신 부족한 재정은 어업과  제염에 대한 부가세인 어·염·선세(魚鹽船稅)와 징집 대상자에게 부과하던 세금인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외에 군량미 조달을 위해 공미(貢米)에 덧붙여 받던 결작(結作)의 징수로 보충하고, 해당 관청에 대한 급대(給代)를 총괄하기 위해 옛날의 수어청 자리에 균역청 청사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양민들의 부담이 반감(半減)되고 종래까지 왕권을 견제하던 신권(臣權)을 억누르는 계기를 만들고 국가재정의 균형을 바로 잡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 경비의 절약책으로 2년 뒤인 영조 29년(1753)에 선혜청에 합병되었다.

대체로 영조 때 균역청의 1년 수입은 돈으로 환산하여 약 60여만냥이 되었으므로 호조(戶曹)의 1년 예산을 웃돌았다.

조선 말 임오군란(1882) 때는 급료를 받지 못한 구식군인들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집을 습격하고 선혜청 창고로 사용되었던 전 균역청에 몰려 들어 쌓여있던 곡식을 배분하기도 하였다.

균역청 자리는 일본인 교육을 위한 일출(日出)소학교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 일신국민학교로 변경되었는데 학생수의 감소로 폐교되어 극동빌딩이 들어서 있다.




17) 군자감(軍資監) 강감 터(江監址)




현재 체신공무원교육원 등이 위치한 용산구 원효로 3가 1번지에 있었던 조선시대 군자감 강감은 군자감에 소속된 창고로 군자창(軍資倉), 또는 군자고(軍資庫)로도 불리었다. 원래 군자감 창고는 조선 건국 초에 세웠으나 협소하므로 태종 10년(1410)에 승려들을 동원하여 서강(西江)에 84칸을 지어 놓아 군량미 30만석을 저장할 수 있었다. 그 뒤 임진왜란을 겪고나서 군량미 비축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인조 18년(1640), 용산강 북쪽에 따로 군자감 강감을 건축한 것이다.

군자감은 군사상에 필요한 물자를 비축하여 그 출납을 맡아 온 관아로 고려 때부터 설치된 제도를 조선 초에도 계승하여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되었다. 즉 조선 5백년간 유사시에 대비하여 중앙의 군량미로 사용될 각 지역의 군자전세(軍資田稅)를 수납하여 군자창에 보관한 것이다. 군자감 본감(本監)은 서부 여경방(餘慶坊), 분감(分監)을 남대문 안에, 그리고 용산에 군자감 강감을 두어 3감이라고 칭하였다.

조선 초에는 군자창에 약 50만석 정도가 비축되어 있었으나 점점 줄어 선조 1년(1568)에는 10만석이 채 못 된 것으로 밝혀졌다.

영조 20년(1744)에는 도성 안의 군자감 본감과 분감을 폐지하였으므로 용산 군자감 강감은 실질적으로 군자감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군사 물자 비축 외에도 그 기능이 확대되어 각 관아의 쌀과 콩을 보관하고, 군사와 잡직 관원의 급료를 지급하였다.

그 후 이 곳은 인천에서 이전해 온 전환국이 자리하였는데 청일전쟁 때 일시적으로 일본군의 주둔지로 쓰였고, 일제 때 조선서적주식회사가 들어섰다. 광복 후에는 한국인쇄주식회사로 고쳐지고 체신공무원교육원이 사용하고 있다.




18) 전환국 터(典圜局址)




고종 20년(1883)부터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던 임시 주전소로는 충분한 화폐를 주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는 상설조폐기관으로 전환국을 설치하여 근대식 주화(鑄貨)기계를 도입, 새로운 화폐를 다량으로 발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84년, 선혜청 별창 자리(현재 중구 남대문로 4가 46번지 대한상공회의소 부근)에 전환국 청사를 짓고 독일의 기술자 세 사람과 새로운 기계를 구입하여 그 이듬해인 고종 22년(1885)에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전환국에서는 15종에 달하는 근대화폐를 주조, 발행하려고 하였으나 시험적인 단계로 그쳤다. 이 당시 화폐 원료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겨 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데다가 일본이 조선의 화폐권을 침해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고종 29년(1892) 서울의 전환국은 인천으로 이전되었다. 인천 전환국에서는 은화(銀貨), 백동화(白銅貨) 등 5종의 화폐를 주조하였으나 이 화폐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광무 4년(1900), 경인철도의 개통을 앞두었으므로 원료의 운반이 용이해지리라는 점도 있고, 당시 러시아의 간섭으로 일본세력이 약화되자 자주 독립사상이 팽배함에 따라 인천의 전환국은 용산의 군자감 강감 터로 이전하였다.




19) 강우규(姜宇奎)의사 항일의거 자리




현재 서울역 남쪽(구 중구 봉래동 2가 122번지)에는 남대문역(南大門驛)이 있었다. 이 역은 1905년 5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15평의 작은역으로 세워져 1925년까지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이 계속 진행되었던 이 해(1919) 9월 2일, 만주로부터 국내에 잠입한 강우규의사(1855~1920)는 남대문역을 통해 부임하는 사이또(齋藤實)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였다.

강우규의사는 평안남도 덕천 출신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누나집에서 자라면서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30세 때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하여 한방 의술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면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한일합방으로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조선인들을 모아 신흥촌을 건설하고 광동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광동학교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국내에 들어가서 일본 요인을 없애기로 결심한 뒤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 1개를 구입하여 원산을 거쳐 8월에 서울에 잠입하였다. 일본에서 사이또 총독이 9월 2일에 서울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거사계획을 세운 뒤 남대문역으로 나가서 그를 기다렸다. 엄중한 경계 속에서 환영행사를 치르고 마차에 오르는 사이또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여 수행원·경찰·신문기자 등 37명의 사상자가 났다.

강우규의사는 거사 후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와 은거하다가 9월 17일 체포되었다. 이듬해 5월 27일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이 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은평면 공동묘지에서 우이동으로 이장하였다가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20) 서울의 중심점 표지돌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체포되어 간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의 태화관(泰華館)자리는 공평지구 재개발사업으로 인하여 12층의 태화빌딩과 그 옆에 하나로빌딩이 높이 세워져 있다.

하나로빌딩 옆 공터에는 건양 원년(1896)에 세운 서울의 중심점 표지돌이 놓여져 있다. 이 돌은 당시 서울의 한복판 중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국의 지번(地番)의 중심 지점이 되는 곳이었다. 이 곳에 중심점 표지돌이 설치된 것은 일반적으로 지번을 정하는 순서가 우체국 앞에서 시작함으로 여기에 우체국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 곳에는 현재 네모기둥의 화강암을 둘러싸고 그 모서리에는 마치 연필을 세워 놓은 것과 같은 8각기둥의 화강암 4개가 세워져 있다. 서울은 북악·인왕·남산·낙산 등 4개의 산이 있어서 명당(明堂)인데다가 이 산을 연결하여 성곽을 쌓았으므로 4개의 8각기둥 돌은 4산을 의미하는 것 같고, 가운데의 네모기둥 돌은 한성의 중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경술합방 후 일제는 1914년에 전국 이정표(里程標)의 기준이 되는 곳을 세종로 네거리(현재 충무공동상 아래)로 정하고 도로원표(道路元標)를 설치하였는데 광복 후 현재 교보빌딩 앞의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각으로 이전하였다.




21) 혜민서 터(惠民署址)




현재 외환은행 본점 동쪽인 을지로 2가 192번지에는 조선시대에 의약(醫藥)과 서민을 치료하는 외에 여의사(女醫師)를 교육하던 관아였다.

혜민서는 고려 때 혜민국을 계승하여 조선 건국 후에도 설치되었는데 세조 12년(1466)에 와서 이와 같은 명칭으로 확정되었다. 한양천도 후에 서울성곽을 쌓을 때 동원된 민정들 가운데 부상자가 나타나고, 전염병으로 환자가 발생하자 혜민국에서 이들을 치료하였다.

혜민서에서는 지방 기생 중에서 70여명의 영리한 자를 선발하여 ‘약방기생(藥房妓生)’으로 삼고 의술을 교육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엄격한 내외(內外)로 궁중의 비빈(妃嬪), 궁녀 및 정경부인들이 병에 걸렸더라도 남자 의사가 진찰하거나 치료를 할 수 없으므로 ‘약방기생’들로 하여금 진찰하게 하였다.

혜민서는 인조 15년(1637)에 한 때 전의감(典醫監)에 합병된 적도 있었고, 조선 말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3년 뒤 고종 22년(1885) 의정부의 건의로 혜민서와 활인서 두 관아의 사업을 수행할 광혜원(廣惠院)을 새로 설치하였다가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하였다.

1905년 7월 8일 광무황제는 혜민서와 활인서의 역할을 담당할 대한적십자병원의 설립을 명하고 이 곳에서 서민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22) 영도교 터(永渡橋址)




종로구 숭인동의 숭신국민학교와 동묘에서 중구 황학동 중고품시장으로 가려면 복개된 청계천로를 건너야 하는데 이 곳 황학동 162번지에는 조선시대에 가설된 영도교가 놓여져 있었다.

지금은 청계천이 복개되어 사라지고 말았으나 영도교는 동대문을 나와 뚝섬·광나루로 가는 도성 밖의 주요한 다리로서 교통량이 많았다. 조선 초에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고 하다가 성종 때 돌다리로 놓은 뒤 영도교로 부르게 되었다. 영도교라고 불리운 까닭은 영도사(永導寺)의 중들을 동원하여 놓았기 때문이다. 고종 이후에는 영미교(永尾橋)로 되었다.

이 다리를 영미교로 부르게 된 내력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내놓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이 다리까지 따라 온 송비(宋妃)와 생이별을 하였다고 하여 영이별교(永離別橋)로 일컫던 것이 영미교로 변음되었다는 것이다. 이 다리에서 생이별을 한 송비는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숭인동 17번지 청룡사 옆의 정업원을 지은 뒤 시녀 셋과 함께 초근목피로 지내면서 매일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동쪽 영월을 바라보면서 단종의 평안을 빌었다.

조선 말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 다리를 헐어 궁궐의 석재로 사용하였으므로 이 곳에는 나무로 다리를 놓았는데 장마 때면 다리가 떠내려 가기도 하였다. 청계천이 복개 되기 전에는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었다.




23)보제원 터(普濟院址)




보제원은 동대문 밖 3리 지점, 즉 현재 동대문구 제기동의 선농단(先農壇) 서쪽에 있었던 공용(公用) 여행자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세운 국립 여관이다.

원(院)은 고려 때부터 실시된 제도로 역참(驛站)과 같이 주요 길목에 세워져 있어서 역원(驛院)이라 하는데, 승려들로 하여금 원을 지키게 하여 병자에게는 약을 주고 해가 지면 길손을 무료로 숙박시켰다. 조선 초에도 이를 계승하여 국가에서 운영하다가 임진·병자 양난 후에는 유명무실해져 민간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보제원은 북쪽에 홍제원, 남쪽에 이태원(梨泰院)과 전관원(箭串院)과 함께 도성 부근의 4원(四院) 중의 하나로서 국립여관 역할 외에 기근이 들었을 때 빈민들의 응급 구제기관인 진제장(賑濟場)이었다.

조선시대에 동대문을 나서 동묘에 이르면 삼거리가 되는데 북동쪽 길을 가다가 나타나는 것이 보제원이다. 여기서 안암동·수유리를 거쳐 노원역에 연결되었다.

ꡔ동국여지비고ꡕ에 보면 보제원은 홍제원과 같이 누각(樓閣)이 있었고, 조정에서는 이 곳에서 매년 정월 15일 상원(上元)날과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기로소(耆老所) 재상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24)홍제원 터(弘濟院址)




지하철 3호선 홍제역 북동쪽 출입구 부근(서대문구 홍제동 138번지)에는 조선시대에 국립여관이라고 할 수 있는 홍제원(弘濟院)이 세워져 있었다.

홍제원도 도성 부근 4원(院)의 하나로 공용(公用)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빈민들에게 약을 주기도 했으며, 「의주로(義州路)」에 있었으므로 중국사신이 도성 안에 들어오기 전에 최후로 쉬던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곳은 다른 원보다 규모가 컸으며 누각이 있고, 중국사신이 묵는 공관(公館)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홍제원은 고려 성종 4년(985)에 정현(鼎賢)이란 승려가 세웠지만 고려말에 와서 유명무실했다. 그리하여 조선초의 세종은 이 부근의 주민으로써 원주(院主)를 삼아 관리하게 했으나 조선 중기에 주막이 나타남으로써 쇠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중국을 가기 위해 「의주로」를 따라 무악재를 넘어오면 첫번째 국립여관이 홍제원이었다. 여기서 떡전거리를 지나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러 평안도, 중국으로 향했다. 얼마 전까지도 근방에서 홍제원의 깨어진 기와조각을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자취조차 찾아 보기 어렵다.

그런데 홍제원은 중종 33년(1538)에 태풍으로 크게 파손되었으므로 왕은 사관(史官)과 내관을 보내 그 실태를 알아오게 한 적도 있다.

조선초에는 한성부 안에 여자를 두고 술을 파는 색주가(色酒家)를 허가하지 않았는데. 전해오는 바로는 세종 때 홍제원에 처음으로 색주가촌을 두게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인즉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은 대개 수백명으로 1년에 대여섯번 무악재를 넘어 수석(水石)과 계곡이 좋은 홍제원에서 쉬게 된다.

이 곳에는 환송나온 사람들이 미리 차일을 치고 음식을 마련하여 기생을 부르는 등 사신과 부사 등에게 요란한 환송연을 베풀어 준다. 그러나 사신을 수행하는 하속들은 그들끼리 술잔만 들게되어 불평이 많았다.

이를 목격한 세종 때 허조(許稠)정승이 「홍제원에 노래하는 여자를 배치하여 사신을 수행하는 하속들도 위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진언하자, 세종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끄덕인 뒤 곧 한성부에 영을 내려 홍제원에 색주가를 두도록 했다는 것이다. 홍제원에 색주가가 생긴 뒤로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행인에게 떡을 팔려는 떡집도 생겨났다. 떡 중에서도 인절미를 잘 만들었으므로 ‘홍제원 인절미’가 특히 유명하였다.




25)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동활인서는 동소문 밖 연희방, 현재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전일의 돈암장)에 있었다.

활인서는 고려 때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의 후신으로 조선 초에 질병에 걸린 빈민환자, 주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서울 동·서 두 곳에 설치한 의료기관이다.

동활인서는 이 곳에 위치하다가 조선 후기 정조 때 중구 신당동 236번지, 304번지 일대로 이전해 간 것으로 나타난다. 활인서는 태조 때 대비원이라 하다가 태종 때 활인원(活人院)으로 고치고 세조 12년(1466)에 활인서로 바뀐 것이다.

활인서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의원 외에 무당을 배치시켜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귀(疫鬼)를 퇴치하게 하였으므로 이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으며, 기근이 심할 때는 구호사업도 병행하였다. 인조 24년(1646)에는 전염병이 만연하여 활인서에 수용된 환자가 699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이 곳에는 땀을 내고 찜질하고 목욕하는 시설도 갖추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한 의료시설을 갖춘 공공의료기관으로 추측된다.

활인서는 임진왜란 때 폐지되었다가 광해군 4년(1662)에 다시 설치되었고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그 사업은 혜민서와 통합되어 이어졌고 다시 제중원, 대한적십자병원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26) 서활인서 터(西活人署址)




서활인서는 현재 마포구 아현동 267번지 아현중학교, 아현직업학교, 아현국민학교 자리에 있었다.

동활인서와 같이 질병에 걸린 빈민환자, 주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설치한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이다.

서활인서는 그늘이 없었으므로 여름철에는 환자들이 환부의 통증과 열기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워 했으므로 이 곳에 소속되어 있는 밭과 병막(病幕) 앞에 있는 청파역(靑波驛) 소속의 토지를 교환하여 터를 넓힌 다음 나무를 심어 환자들의 회복, 안식처로 삼게 하였다.

활인서는 만일 환자의 집이 가난하여 치료비를 내지 못하면 국고(國庫)에서 미곡을 활인서에 공급해 주었다. 하루에 주는 쌀은 1되(升)이며 매년 환자의 수를 기록하여 감사에 보고해서 회계를 밝히게 하였다.

조선 말 순조 때 저술한 ꡔ한경지략(漢京識略)ꡕ에 보면 서활인서는 남대문 밖 용산강변에 있다고 하였으니 아현동에서 용산강변으로 일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27) 의금부 터(義禁府址)




종로구 공평동 94·163번지 제일은행 본점 자리에는 조선시대 특별사법기관인 의금부가 있었다.

일명 왕부(王府), 집금오(執金吾), 금부(禁府), 조옥(詔獄)이라고도 칭하는 이 관아는 고려시대의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를 계승하여 조선 초에 설치되었는데 의금부라는 명칭은 태종 14년(1414)에 제정되었다.

의금부는 조선 초에 설치된 후 군사·경찰 기능과 사법적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군사적 기능은 순찰, 체포, 반란 진압을 담당하였으나 군사제도의 정비로 점차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사법적 기능은 첫째, 왕명을 거역하거나 왕권에 도전하는 경우에 응징하고 둘째,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치죄(治罪)하고 셋째, 재판의 재심(再審) 내지 3심(三審)을 담당하며 넷째, 대외관계 범죄나 외국인 범죄를 취급하고 다섯째, 양반관료의 범죄를 취급하여 특별 재판하였다. 대체로 의금부는 수시로 왕명에 따라 죄인을 추국(推鞠)하였다.

또한 의금부에는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의 신고를 접수하였으며 연산군 때에는 공포 정치의 집행본부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는 의금사로 고쳐져 법무아문(法務衙門)에 속하여 관리들의 범죄를 다스리다가 이듬해에 고등재판소로 되었고, 광무 3년(1899)에 평리원(評理院)으로 개편되었다.




28) 독립회관 터(獨立會館址)




현재 영천동 69번지(전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독립문 남쪽에는 독립관(獨立館)이 있었다.

독립관은 민간단체인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헐어내고 나서 건양 원년(1896)에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한 뒤에 이 같이 명명하고 이 건물을 독립협회의 본부로 삼았다. 그러나 이 건물은 일제 때 헐렸다.

모화관은 조선 초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빈관(迎賓館)이자 귀국시에는 전송하는 곳으로 태종 7년(1407)에 건립하고 모화루(慕華樓)라고 하였는데 세종 때 개축 후에 모화관으로 칭하였다. 그 이듬해 건물 남쪽에 큰 연못을 파고 연(蓮)을 심었을 뿐 아니라 고기를 넣어 길러 백성들의 원성을 자아냈다. 또한 이 부근은 넓은 공한지여서 군사의 조련 및 무과(武科) 시험장소로 쓰였다.

조선 5백년간 모화관은 중국 사신의 숙소라기 보다 영접이나 전송하던 곳으로 이용되다가 청일전쟁 후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 가뭄이 들면 이 곳과 창덕궁 후원, 경회루에서 도롱뇽을 물독에 넣고 어린이 수십명이 버드나무가지로 물독을 치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비를 빌었다.




29) 경기감영 터(京畿監營址)




종로구 평동 164번지, 서울적십자병원 일대는 현재 경기도청에 해당하는 경기감영이 있었다.

경기감영은 일명 포정사(布政司)로서 조선 초 태조 2년(1393)에 설치되어 건양 원년(1896)에 수원으로 이전할 때까지 이 곳에 있었다. 경기감사(京畿監司) 또는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가 있었던 경기감영은 이·호·예·병·형·공방의 6방(六房)과 도사(都事)·판관(判官)·막비(幕裨) 등이 소속되어 경기도의 일반행정과 군정(軍政)·사법·경찰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조선 말에 수원으로 이전 된 후 이 자리에는 군영(軍營)이 들어섰다가 1903년에 한성부가 옮겨 왔다. 1908년 한성부가 세종로의 형조 자리로 옮기자 일본인 죽첨공립소학교의 교사 사택으로 사용되다가 일제 때인 1914년부터 고양군청으로 사용하였다.




30) 김정희(金正喜)선생집 터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밖의 종로구 통의동 7번지에는 조선 말의 문신이며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인 김정희(1786~1856)선생이 살던 집이 있다.

이 곳은 조선시대에 천문·지리·측후 등을 관장하던 관상감(觀象監)과 궁중의 어류·식육·소금·연료 등을 공급하던 사재감(司宰監)이 있었으며, 인근에는 영조(英祖)의 잠저(潛邸)이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를 제사하는 문희묘(文禧廟)로 쓰인 창의궁(彰義宮)이 있어서 이 안에 6백년 된 통의동 백송(白松)이 서 있었다.

추사(秋史)·완당(阮堂) 등 백여개의 호를 가진 김정희선생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살던 집이 남아있어서 여기서 태어났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그는 어려서 백부에게 양자로 입적되었고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에게 글을 배웠다. 순조 19년(18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병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그의 생부(生父)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 제주도에 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는 청나라에 가서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등을 만나 고고학과 금석학에 대해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 이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였다. 그 결과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시(詩)·서(書)·화(畵)에도 뛰어난 재질을 지녀 글씨는 20세 전후에 국내외에 이름을 떨쳐 제주도에 귀양살이 중에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31) 와서(瓦署) 터




용산공업고등학교가 자리잡은 용산구 한강로 3가 65번지 일대는 「왜새마을」, 「왜새안말」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이 명칭은 조선시대 5백년간 국가기관에 필요한 기와나 벽돌을 구워내는 것을 관장하던 와서(瓦暑)라는 관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새마을」이란 이름은 「와서마을」이 잘못 불리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곳은 한성부 남부 둔지방(屯芝坊) 와서계(瓦署契)라 했고 와현(瓦峴)이란 고개이름도 있었다.  이곳의 토질은 서울의 어느 곳보다 기와와 벽돌을 만드는데 좋은데다가 흙이 풍부하고 한강물을 끌어쓰기가 편리했기 때문에 조선초에 와서를 설치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 태종 6년(1406년) 6월에, 중 해선(海宣)이 서울에 초가집이 많아 미관상 좋지 않고 화재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여 대량으로 기와를 굽는 관아를 설치하여 사람들이 값싸게 사서 쓸수 있게 하면 10년이 채 못되어 모든 집이 기와집으로 바뀔 것이라고 건의하자, 태종은 이를 옳게 여겨 서울의 모든 집을 기와집으로 바꾸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리하여 서울 두 곳에 별와요(別瓦窯)란 관아를 설치하고 승려 2백 70명과 기와 굽은 장인, 즉 와장(瓦匠) 40명을 뽑아 기와를 대대적으로 굽게했다. 그러나 3년째 되던 해에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조정에서는 별와요를 폐지하고 와서만 남겨 두었다.

와서는 5백년간 존속되다가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와서가 폐지된 후에도 민간인들이 이곳에서 기와와 벽돌을 구워냈다. 특히 현재의 명동천주교회당을 지을 때 사용한 벽돌은 이곳에 중국인들이 세운 공장에서 구운 것이다.

그 후 와서 자리에는 1952년에 항공대학의 전신인 항공학교가 들어 섰다가 용산역으로 이전하고 대신 용산공업고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32) 장승(長承)백이




동작구 상도동 영도시장 맞은편 3거리의 상업은행 상도지점(상도동 363의 4) 앞에는 조선시대에 장승(長承, 長牲)이 세워져 있었으므로 장승백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서울시민들 중에는 상도동의 위치는 잘 몰라도 장승백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장승백이에서는 마을의 공동문제, 즉 부락제나 기타 여러가지 일을 의논했다.

장승은 동네 어귀나 사찰 입구에서 볼 수 있었다. 장승은 경계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이수(里數)를 적어 10리나 5리마다 세워둠으로써 이정표(里程標) 역할을 했으며 특히 악귀를 막는 수호의 샤머니즘이기도 했다.

장승에는 돌로 만든 석장승(石長承), 나무로 만든 목장승(木長承)이 있는데 대부분 목장승이다. 대개 사람과 비슷하게 조각을 하고 남상(男相)에는 관을 씌웠다. 또 남상의 몸뚱이에는 붉은 색으로 여상(女相)에는 청색으로 색칠하거나 아니면 먹으로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등의 글을 써서 위엄을 보이게 했다.

이 곳 상도동 3거리에 장승을 세우게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었다.

조선 후기 정조는 왕위에 있는 동안 한시도 부친인 사도세자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정조는 동대문구 배봉산에 모신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華山: 지금의 수원) 현륭원에 이장하고 수시로 참배했다.  노량진을 건너 현륭원으로 가는 정조의 어가(御駕)는 이곳에서 쉬어가야 했으나 당시에 이 곳은 인가(人家)도 없고 행인 마저 적은 한적한 곳이었다. 따라서 낮에도 맹수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이에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 곳은 장승백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현륭원을 참배하러 가고 오는 길에 이 장승 앞에서 어가를 멈추고 쉬어갔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미신과 무속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없애버렸으므로 1987년에 서울시에서 「장승백이」라는 표석(標石)을 세워 놓았고, 주민들에 의하여 장승이 만들어져 서 있다.




33) 화양정 터(華陽亭址)




건국대학교 부속 민중병원 서쪽 언덕의 주택가 화양동 110번지 32호에는 조선 초 세종 14년(1432)에 세운 화양정이 있었다.

성동구 화양동이란 동명도 화양정에서 연유된 것인데 이 곳은 조선시대 국립목장인 살곶이벌(箭串坪) 안의 말을 기르는 일과 연유되어 세워진 정자였다. 이 정자의 이름은 ꡔ주서(周書)ꡕ에 말이 화산(華山) 남쪽에 돌려 보낸다는 뜻을 취하여 화양이라 지은 것이다.

이 정자는 1911년 7월 21일, 벼락이 떨어져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 규모는 4각정으로서 기둥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큰 정자이며 내부가 100여칸이 되었다.

이 정자를 일명 회행정(回行亭)이라고 하는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내 놓고 상왕(上王)이 된 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가 실패하자 세조 3년(1457) 6월 21일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그 이튿날 군사 50명의 호위를 받으며 강원도 영월로 귀양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세조는 내시(內侍)를 화양정까지 나아가 노산군을 전송하도록 하였다. 노산군은 ‘화양정’ ‘화양정’하고 되뇌이며 이 길이 부디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회행(回行)길이 되었으면 하면서 귀양길을 떠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노산군이 영월에서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서 화양정을 회행정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조선 말 고종 19년(1882)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 때 민비(閔妃)가 상궁 옷으로 변복을 하고 구식군인들의 눈을 피해 창덕궁을 빠져 나와 장호원으로 피신할 때 광나루로 가는 도중에 이 곳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전한다. 그 후 민비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 화양정 터에는 7그루의 느티나무 고목만 들어 서 있는데 그 중에는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된 650년이 넘는 고목도 있다.




34) 조지서 터(造紙署址)




현재 세검정국민학교 남쪽, 종로구 신영동 196번지 일대의 「세검정길」 도로변에는 조선시대에 각종 종이를 만드는 관아인 조지서가 있었다.

조선 초 태종 15년(1415)에 조지소(造紙所)라는 명칭으로 이 곳에 설치하였는데 세조 12년(1446)에 조지서로 개칭되었다가 고종 19년(1882)에 폐쇄되었다. 이 곳에 조지서를 설치하게 된 것은 북한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홍제천의 맑은 물이 흐르고 반석(盤石)이 많아서 종이를 제조하기에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태종이 조지소를 설치하게 된 동기는 태종 10년(1410)에 지폐인 저화(楮貨)를 통용하게 되자 이를 만들 종이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즉 저화를 만들 종이를 각 도에서 나누어 만들어 상납하는데 규격이 일정하지 않으므로 서울 안의 한 곳에서 만들어 바치게 하자는 건의가 있어서 이를 논의한 끝에 조지소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조지서에서 사용되는 원료 중의 닥나무는 외지에서 공물로 헌납하게 하였으며, 목회는 도성 내와 성저십리(城底十里)에 거주하는 주민이 부담하게 하였다. 그러나 도성 내의 각 집에서는 목회가 부족하여 예종 때에는 쌀로서 대납하기도 하였다.

조지서를 일명 조세라고 칭하는 까닭에 이 부근의 고개를 조세고개라 하였는데 「세검정길」이 확장 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35) 홍영후(洪永厚)선생 살던집




홍난파로 잘 알려진 홍영후선생(1897~1941)은 일제 때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나 서울에 올라와 현재 종로구 홍파동 2-16번 지에 살았던 그는 일제 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을 호소하듯 애절하여 일본 경찰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 못지 않게 싫어했던 가곡 ‘봉선화(鳳仙花)’를 작곡하였다.

1912년에 YMCA 중학부에 입학하면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어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음악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의 양악부를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우에노음악학교(東京上野音樂學校)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다가 일시 귀국하였다. 그러나 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하여 재입학이 되지 않자 분개한 마음으로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창작곡집 ꡔ처녀혼ꡕ을 출간하였다. 이 때 ‘봉선화’는 이 책의 첫머리에 ‘애수(哀愁)’라는 곡명으로 발표되어  김형준(金亨俊)이 노래하였다.

이어서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 ꡔ음악계(音樂界)ꡕ를 창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는 ‘성불사의 밤’ 등 많은 작곡을 남겼는데 작곡 경향은 한국 선율의 요소를 반영시켜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1937년 흥사단의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끝에 44세로 병사하였다.




36) 경조아문 터(京兆衙門址)




한성부(漢城府)의 별칭인 경조부(京兆府)는 조선시대 수도 서울의 행정, 사법과 전국의 호적(戶籍)을 관리하던 관아였다.

한성부는 경관직(京官職)의 정2품 관아로서 한양 천도 후 그 청사를 광화문 앞 「육조(六曹)거리」에 건립하였다. 이조(吏曹)와 호조(戶曹) 사이에 위치하였는데 이 곳은 전의 한양부 성황당(城隍堂)이 있던 곳으로 동쪽에는 큰 개울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대로가 나 있었다.

조선 왕조는 개경에서 천도한 후에 한양부(漢陽府)로 불리우다가 태조 4년(1395) 6월에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져 5백년간 내려오다가 일제 때 경성부(京城府)로 바뀌었다.

한성부는 서울의 호적은 물론 전국의 호적을 작성, 관리하고 시장, 점포, 가옥, 농토, 산림 관리, 도로, 교량, 개천, 탈세와 공공 기물의 낭비에 대한 추심, 채무, 폭력, 방범순찰, 시신 검시, 차량, 가축 낙인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조선 초에 태종 13년(1413) 살인, 강도 등의 중죄인은 형조에서 다루고, 친족 불목(親族不睦), 절도, 간통, 구타, 욕설 등의 경범죄인은 한성부에서 범인을 구속, 심문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 서울의 토지·가옥·묘지·노비 등의 소송을 맡아 처리하므로 형조(刑曹)·사헌부(司憲府)와 더불어 삼법사(三法司)라고 칭했다.

  이와같은 다양한 업무는 이방(吏房),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형방(刑房), 공방(工房)의 6방에서 분담했다.

조선 후기에 와서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고 예조(禮曹) 청사를 사용하게 하자 예조가 한성부로 이전하면서 한성부는 경희궁 동쪽의 훈국신영(訓局新營)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훈국신영으로 옮긴 한성부가 원래 위치인 「육조거리」의 옛 건물에 복귀하였으나 1895년 5월 1일에 경무청(警務廳)이 한성부 청사를 사용하게 되자 한성부는 군기시(軍器寺) 자리(현재 서울시청)로 옮겨 왔다.

이어서 광무 5년(1901) 5월에는 종로 네거리(현재 화신백화점)로 이전하였다가 2년 후인 광무 7년(1903)에는 경기감영(현재 서울적십자병원) 자리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융희 2년(1908)에는 서서(西署) 적선방(현재 세종문화회관)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1901년에는 다시 「육조거리」로 이전하여 중추원(中樞院)과 함께 건물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처럼 한성부가 45년간 7차례나 이전을 거듭한 것은 한성부의 지위가 하락하여 그 실권이 약해진 것에 기인한다.

  한편 한성부의 정규 관원은 가장 많을 때가 융희 3년(1909)에 31명이였고, 가장 적은 때는 고종 24년(1887)으로 6명이 근무한 적도 있다. 즉 조선 말기에는 한성부의 임시직원은 126명이 있었으니 150여명의 직원으로 20만 서울인구의 살림을 맡은 셈이다.

  

37) 대한매일신보 사옥(大韓每日申報社屋)




현재 사직터널 위쪽의 종로구 행촌동 1번지에는 권률장군의 집에 심어져 있었던 400년이 된 은행나무 고목이 있고, 그 서쪽에는 벽돌 2층 양옥이 있는데 이 건물은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말기에 위기일로의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국가 보존의 대명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한문과 영문으로 발행한 신문이다.

이 신문은 광무황제와 애국지사들이 일본의 사전검열을 피하고자 1905년 7월 8일 영국인 배설(裵說, Bethell, Ernest.T, 1872~1909)을 내세워 은밀히 지원하여 국한문체로 현재 종로구 홍파동 2-38번지에서 창간하였다. 이 당시 총무에 양기탁(梁起鐸), 주필에 박은식(朴殷植) 그 밖에 신채호·최익 등이 참여하였다.

배설은 1904년 3월 런던데일리뉴스의 특파원으로 내한하여 민족항일지인 대한매일신보  발행 취지에 찬동하여 국한문으로 발행하고 이어서 1905년 7월 8일 영문판, 1907년에는 국문판을 각각 발행하여 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었다.

그는 일제의 침략정책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여 배일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므로 1908년 일제는 주한영국총영사관에 공소하여 중국 상해에서 3주일간 금고형을 받았다.

배설의 후임으로 그의 비서였던 영국인 맨함(萬咸, Marnham, A.W.) 이 신문의 사장이 되어 1910년 6월 이장훈에게 매도하였는데 8월까지 계속 발행하다가 한일합방 후 일제의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되었다.




38) 김상옥 의거 터(金相玉義擧址)




현재 제일은행 본점(종로구공평동 100번지)은 조선시대 의금부(義禁府), 한성재판소 터로 일제 때에는 종로경찰서가 있었다.

일제 때인 1923년 1월 12일, 항일투사 김상옥(金相玉, 1890~1923)의사가 중국에서 잠입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고문하던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7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일본인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

김상옥의사는 3·1운동 후 혁신단(革新團)이란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사상을 계몽,고취하고, 1920년 총독부 관계 요인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1922년 11월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일본 총독 및 관공서에 대한 암살·파괴 계획을 세운 후 몰래 입국하였다.

그러나 총독 암살 거사는 시일을 끌게 되어 종로경찰서에 먼저 폭탄을 던지고 후암동의 매부 고봉근의 집에 은신하였다. 이로부터 5일 후에 김상옥의사는 일본 무장경찰 20명에게 포위되었으나 총격전을 벌이고 탈출하여 1월 19일 효제동 이혜수 집에 은거하였다. 1월 22일 새벽, 다시 일본경찰 수백명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3시간 반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장렬하게 자결하였다.

종로경찰서는 광복 후에 경운동 90-18번지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는 1955년에 신신백화점(新新百貨店)이 들어섰다가 1983년에 헐리고 제일은행 본점이 세워졌다.




39) 박규수선생집 터(朴珪壽先生家址)




현재 헌법재판소가 위치한 종로구 재동 83번지는 조선 말 개화파의 선구자 우의정 박규수(朴珪壽, 1807~1877)가 살던 곳이다.

이 집 터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행하던 풍양조씨(豊壤趙氏)가 대대로 살았던 곳으로 조대비(趙大妃)의 친정 집이기도 했다.

이 집은 고종 10년(1873)을 전후하여 실학자(實學者)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박규수가 살게 되었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실학과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은 탓에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 개방을 주장하였다.

박규수는 헌종 14년(1848)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철종 12년(1861)과 고종 9년(1872)에 각각 중국에 다녀온 후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화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진주민란(1862)의 안핵사로 임명되어 난을 수습하고 고종 3년(1866) 평안도관찰사 재임 중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만」호가 대동강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자 이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형조판서, 우의정에 재임하면서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1874년에 사직하고 한거생활에 들어갔다. 이 당시 그의 사랑방에는 홍대용·오경석·유대치를 위시하여 김옥균·박영효·김윤식·유길준·홍영식 등이 출입하면서 개화사상을 전수받았다.

1875년 일본이 「운양호(雲揚號)」사건을 일으키자 박규수는 척화 주장을 꺾고 문호개방을 적극 주장하여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김윤식(金允植)은 그를 일컬어 크게는 세계의 정세에 통달하고 작게는 금석학·고고학 등의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의 집 뜰에 서 있었던 600여년된 재동 백송(白松)은 천연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고, 그 후 이집은 군부대신 이윤용(李允用)의 소유로 되었다가 광혜원(廣惠院)이 들어섰으며, 일제 때인 1911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쓰였다. 광복 후 창덕여자중고등학교가 사용하다가 1989년 강동구 둔촌동으로 이전하여 헌법재판소가 새로 건물을 짓고 들어섰다.




40) 송시렬선생집 터(宋時烈先生家址)




서울과학고등학교 서쪽의 종로구 명륜동 1가 2-24번지 일대는 조선 후기 현종 때 좌의정을 지낸 유학자 우암(尤庵) 송시렬(1607~169)선생이 살았다.

이 곳에 송시렬선생이 살았으므로 이 부근의 마을 이름이 송동(宋洞)이라 하였다. ꡔ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ꡕ에 보면 「성균관 서쪽 기슭에 우암의 옛집이 있어서 송동(宋洞)이라 한다. 골짜기가 깊고 그윽한데 바위벽에 ‘증주벽립(曾朱壁立)’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암의 글씨이다. 마을 안에는 꽃나무가 많아서 봄에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고 소개하고 있다.

현재 명륜동 1가 5번지 99호의 주택가 큰 바위면에는 중국의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말을 기리어 송시렬이 쓴 ‘증주벽립’이 새겨져 있어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시렬은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유학을 공부하고 후일 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병자호란 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북벌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서인(西人)의 대표격이 된 그는 예송(禮訟)문제로 남인과의 여러차례 충돌하여 유배되었다가 관직이 복위되는 등을 반복되었고,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노론, 소론으로 분당(分黨)되었다.

송시렬선생이 생존 당시의 집은 넓고 그윽해서 현재 서울과학고등학교 자리도 울 안에 있었다. 현재 이 학교 운동장 북서쪽에는 너럭바위(磐石) 위에는 송시렬의 글씨로 전하는 ‘금고일반(今古一般)’ ‘영반(咏磐)’이란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후 이 집과 흥덕사 터는 조선 말 고종 22년(1885)에 무당 진령군(眞靈君)이 세운 북관왕묘가 세워졌다가 융희 2년(1908)에 철폐되고, 1930년 4월에 중앙불교전문학교가 자리했다. 그 후 경기여자대학이 들어섰다가 1963년 사립 은석국민학교가 사용하였는데 이 학교가 이전한 후 주택들이 들어섰다.




41) 흥화문 터(興化門址)




흥화문은 조선시대 5궁(五宮)의 하나인 경희궁의 정문으로 현재 종로구 신문로 1가 58-1번지 구세군회관빌딩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이 문은 조선 후기 광해군 8년(1616)에 경희궁을 지으면서 궁궐 동쪽에 정문으로 세운 것으로 흥화문이란 현판 글씨는 이신(李紳)이 썼다고 ꡔ한경지략ꡕ에 소개되어 있다. 이 현판의 글씨가 어찌나 명필이었던지 그 광채가 현재 세종로 네거리 부근에서도 볼 수 있도록 밤에도 환히 비추었으므로 종로구 당주동 골목은 야조개(夜照峴)라 하였고, 이에 따라 경희궁을 ‘야조개대궐’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문은 한일합방 후 일제가 경희궁을 헐어 내고 일본인의 경성중학교를 세울 때 1915년 경희궁의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매각되어 중구 장충동 2가 202번지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받드는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이 되었다. 광복 후 이 건물이 영빈관(迎賓館)으로 바뀌면서 흥화문 글씨 대신 영빈관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으며, 신라호텔이 세워진 후에도 이 호텔의 정문이 되었던 것이다.

흥화문은 1974년 1월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는데 최근 서울시에서 경희궁 복원을 하면서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쓰인 이 문을 전일 서울고등학교 정문 자리에 이전하였다.




42) 권율 도원수집 터(權慄都元帥家址)




사직터널 위쪽, 대한매일신보사 건물 옆의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 종로구 행촌동 1-113번지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거둔 권율(權慄; 1537~1599)장군의 집이 있었다.

약 400년이 된 이 은행나무는 권율장군집 울 안에 심어져 있었던 것으로 행촌동(杏村洞)이라는 동명이 유래되었고 은행동, 은행나무골이라고 불렀다. 이 나무는 신목(神木)이어서 나무에 올라가는 사람은 괴질을 앓거나 변사(變死)하며, 평상시에는 열매를 맺지 않지만 국가에 이변이 생길 때에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 사전에 예고를 해준다는 설이 있다.

권율은 선조 15년(1582)에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광주목사로 임명되어 이치(梨峙)에서 황진과 함께 전주로 들어오는 왜군을 격퇴하고 전라감사로 승진하였다. 장군은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수원 독성산성에서 북진하여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승병 처영(處英)의 1천명 등 1만명 미만으로 선조 26년(1593) 2월 12일, 3만명의 왜군을 맞아 큰 승리를 거두니 이른바 행주대첩이다. 이리하여 권율은 도원수(都元帥)가 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직산에서 왜군의 선봉을 격파하여 북상을 막았다.

권율장군은 종로구 필운동 12번지 배화여자중고등학교에서 살았다가 맏사위 백사 이항복(李恒福)에게 집을 물려 주고 행촌동으로 이사하였다. 현재 이 곳 바위벽에는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이항복의 자필로 알려져 있다.




43) 이 황선생집 터(李滉先生家址)




현재 중구 서소문동 57번지, 대법원 구내에는 조선시대의 위대한 성리학자 퇴계(退溪) 이 황(李滉; 1501~1570)선생이 살았다.

이 황선생은 1523년에 성균관에 입학,1528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153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고, 1566년에는 공조·예조판서를 지낸 뒤 1568년에는 우찬성을 거쳐 대제학을 지내고 다음 해에 고향에 은퇴하였다.

이 황선생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성(誠)」을 기본으로 일생동안 「경(敬)」을 실천하고 주자(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전심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하였고, 일본 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이 황선생이 살던 이 곳은 조선시대에 학교동(鶴橋洞)으로 불리었다. 이 집 뜰에는 수십길이나 되는 전나무 고목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도 오직 이 나무만은 상하지 않고 무성하였으나 광해군 3년(1611) 봄에 갑자기 나무가 부러져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이 나쁜 흉조(凶兆)는 이 해 여름에 나타났다. 정인홍(鄭仁弘)이 박여량(朴汝樑)을 시켜서 이 황을 헐뜯어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문묘(文廟)에 모시지 못하게 상소하였던 변을 당한 것이다.




44) 태평관 터(太平館址)




동방생명 빌딩 뒤쪽, 한국주택은행 서소문지점 자리에는 조선 초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유숙하게 하던 영빈관(迎賓館)으로서 태평관이 있었다.

태조 4년(1395)에 각 도의 인부 1천명을 동원하여 세워진 태평관 건물은 중앙에 전(殿)이 있고, 이 건물의 동, 서쪽에는 행랑채가 자리 잡았으며 뒤곁에는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이 누각에 오르면 서울 장안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으므로 명나라 사신들은 으례 이곳에 올라 시부(詩賦)를 지었다. 이 태평관 건물은 인조 때 헐려 홍제원을 보수했다고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大東地誌)」에 기록되어 있다.

태평관은 명나라 사신들의 영빈관으로 쓰인 외에 태종 1년(1401) 6월에 명나라 사신이 가져온 고명(誥命)과 금인(金印)을 받는 의식을 이곳에서 거행함으로써 정식 국왕이 된 셈이다. 그런가 하면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이곳에서 가례(嘉禮)를 올렸다.

한편 중국사신이 태평관에 머물게 되면 잡귀를 쫒는 나례(儺禮)를 이곳에서 벌이기도 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은 때에 태평관이 좁고 누추하다 해서 차제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이전해 짓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박 은(朴訔)과 이원(李原)은 태평관을 이전하려면 많은 민가를 헐어야 하고 또 태평관을 궁궐 가까이에 짓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자 세종은 이 의견에 따라 개축하기로 했다. 그러자 유정현(柳廷顯)이 나서서 태평관을 개축하려면 강원도에서 재목을 베어와야 하고 또 많은 장정을 동원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니만치 차라리 외적을 대비하여 병선(兵船)을 만들고 변방에 성벽을 쌓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태평관 개축은 후일로 연기 되었다.

태평관에 중국사신이 유숙하게 되면 그 뒷쪽에서는 태평관후시(太平館後市)라는 저자가 섰다. 즉 중국사신을 따라 온 일행들이 가지고 온 진귀한 물건과 우리나라 토산품과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진 사무역(私貿易)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45)남별궁 터(南別宮址)




중구 소공동 87번지 조선호텔 자리에는 조선 후기에 중국 사신이 유숙하던 남별궁이 있었다.

조선시대 별궁(別宮)의 하나인 남별궁은 원래 태종의 차녀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조대림(趙大臨)에게 출가하여 거주하던 저택이어서 소공주댁(小公主宅)으로 부르던 것이 이 일대를 소공동이라고 칭하여 오늘날까지 유래 되었다.

선조 16년(1583)에 왕은 이 집을 크게 수리하여 3남 의안군(義安君)에게 주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의 주둔지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군이 남쪽으로 내려오자 이여송(李如松)이 머무르게 되었다. 이 뒤로 선조가 환도하여 이 곳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관원들을 접견하고 요담하게 되자 남별궁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그 뒤에도 남별궁은 명나라,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정조 2년(1778)에는 빈객 접대와 연향(宴享) 등을 맡아보는 예빈시(禮賓寺)를 이 궁 안으로 이전하였다.

남별궁 후원에는 작은 정자가 있고 돌거북이 있어서 영험이 있다고 전해오며, 동구(洞口)에는 큰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한 후 광무황제가 하늘에 고한 원구단(圜丘壇)이 설치되었으나 일제가 이를 헐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하였다.




46) 동평관 터(東平館址)




중구 인현동 2가 192번지에는 조선시대 일본 사신이 머물던 숙소인 동평관이 있었다.

일명 왜관(倭館)으로 부르던 이 곳은 조선 초부터 일본 사신의 내왕이 있자 태종 7년(1407)에 이들의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 16년(1434)에는 동평관을 위시하여 서평관 및 묵사(墨寺)에 일본 사신을 머물게 한 바 이들이 금지한 물건을 사고 파는 밀수 행위를 하였으므로 동관과 서관을 합하여 1관으로 하고 사면에는 담장을 높이 쌓아 문을 엄중하게 지키면서 잠상(潛商)의 출입을 단속하였고 4년 뒤에는 감호관(監護官)을 두었다.

동평관에는 관사와 창고를 설치하여 그릇과미곡을 저장하고 일본 사신과 객인을 접대하였다.

세종 27년(1445)에는 동평관에 머물던 왜인들이 몰래 담을 넘어 민가에 들어가 행패하는 자가 생겨 의금부에서 체포한 일도 있었고, 삼포왜란 때에도 10여명을 감금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왜인들의 일으킨 폐단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동평관은 불타버렸으며 그 후 일본 사신의 상경(上京)을 불허하면서 폐쇄되었다.




47) 이태원 터(梨泰院址)




현재 용산구 용산동 2가 1번지, 용산고등학교 자리에는 조선시대 서울에 출입하는 관리나 길손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숙소인 이태원이 있었다.

이태원동은 현재 남산 1호터널 남쪽 입구의 동쪽 일대에 위치하지만 원래 이태원 마을은 용산동 2가에 있었던 것을 1906년에 일제가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해 현재 지역으로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이다.

이태원은 홍제원, 보제원, 전관원과 함께 서울 주변의 원(院)의 하나로서 「영남로(嶺南路)」로 향하는 첫번째 숙박시설이었다. 조선 초에는 이태원(李泰院)으로 한문 표기가 달랐는데, 남산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터로 이용하였고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ꡔ용재총화ꡕ에 소개되어 있다.

임진왜란 후에 조선에 항복하고 귀화(歸化)한 일본인들이 거주하였다 하여 이 곳을 이타인(異他人)이라 하였고, 이 곳에 있었던 운종사(雲鐘寺)라는 비구니 절에 왜군들이 주둔한 후 여승들을 욕보여 혼혈아가 출산되었으므로 이들을 보육하는 곳이라 하여 이태원(異胎院)으로 부르던 것에서 동명이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48) 이덕형선생집 터(李德馨先生家址)




현재 「퇴계로ꡕ변 중구 남대문로 5가 526번지 대우재단 빌딩이 위치한 곳은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한음(漢陰) 이덕형(1561~1613)선생이 살았다.

선조 13년(15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원이 된 후에 이조정랑으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하여 존경을 받았다. 예조참판과 대제학을 겸하고 있을 때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북상 중에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에서 그를 만나자고 하여 단기로 내려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고 청원사로 명나라에 가서 명군의 파병을 성취시켰다. 이어서 한성판윤으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시켜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군과 울산까지 동행, 이들을 위무하였다.

이어서 좌의정 겸 훈련도감제조로서 순천에서 이순신장군과 함께 왜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왜란 후 민심수습과 군대정비에 노력하고, 대마도 정벌을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처형과 인목대비 폐모론이 거론되자 이항복과 함께 극력 반대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는 만년에 도동과 동자동의 경계가 되는 송경현(誦經峴)에서 거처하면서 경전을 낭송하였으므로 이와 같은 고개이름이 붙여졌다.




49) 전관원 터(箭串院址)




성동구 행당동 70-27번지 부근에는 조선시대 서울에 출입하는 관리나 길손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숙소인 전관원이 있었다.

ꡔ동국여지승람ꡕ 3권에 전관원은 살곶이다리 서북쪽에 있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곳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동구 성수동 일대를 조선시대에는 살곶이들(전관평,箭串坪)이라 하였으므로 도성에서 남동쪽으로 향하는 길손이 숙박하는 곳을 전관원이라 하였을 것이다. 살곶이 들은 평평한 곳이어서 말을 기르는 국립목장이었는데 이 명칭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온다.

조선 초에 두번이나 왕자의 난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함흥에 내려가 있는 태조 이성계를 서울로 모셔오기 위하여 여러가지 애를 썼다. ‘함흥차사(咸興差使)’란 말이 있듯이 신하들이 함흥으로 내려가면 태종을 미워하던 태조가 죽여버렸으므로 왕은 무학대사를 보내 설득하여 태조가 서울로 오도록 하였다.

태종은 살곶이 들에서 태조의 환영연을 열도록 하였다. 이 때 하 륜(河崙)은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연회장에 큰 차일을 칠 때 굵고 긴 기둥을 여러개 세워 놓도록 하였다.

태조를 모시고 태종이 인사를 드리려 하니 갑자기 태조가 태종에게 활을 쏘므로 태종은 굵은 기둥을 안고 요리조리 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 후부터 이 일대를 살곶이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50) 역삼동 청동기시대 집 터(驛三洞靑銅器時代家址)




이 청동기시대 집 터는 발견 당시인 1966년대에는 성동구 역삼동 산 21번지 1호였으나 행정구역 변경으로 현재는 강남구 도곡동 32번지 1호로 바뀌었다.

이 집 터는 1966년 5월에 숭실대학교 임병태(林炳泰)교수가 사학과 학생들과 한강유역을 답사하던 중 이 곳 매봉산 정상에서 6·25전쟁 때 군인들이 파 놓은 참호 속에서 무문토기 파편을 발견함으로써 관심을 갖고 이 해 8월 22일부터 29일까지 발굴 조사하였다.

이 곳에서는 길이 16m,폭 3m(약 12평)의 수혈식(竪穴式)집 터로서 돌도끼 3개, 돌화살촉 3개, 반월형 돌칼, 숫돌 6개, 망칫돌 3개, 무늬없는 토기 9개, 붉은색 토기 2개 등이 발굴되었다.

이 집 터는 기원전 4~5세기 일본의 미생식(彌生式) 토기보다는 더 앞서므로 기원전 7세기~4세기 사이의 주거지로 볼 수 있는데 본격적으로 발굴해 보면 이 외에도 많은 유물과 유적이 출토될 것이다.




51) 어영청 터(御營廳址)




종로구 인의동 48-2번지, 서울 전매지청 자리에는 조선 후기 5군영(五軍營)의 하나인 수도 방위와 왕실 호위를 맡았던 어영청이 있었다.

어영청은 인조 반정 후 인조 원년(1623) 국내정세가 어수선하고 국제적으로 후금과의 관계가 위급해진 가운데 설치되었다. 그 후 어영청은 이 괄의 난을 겪을 때 왕을 호종하면서 1천여명으로 증원되어 훈련도감과 함께 중앙군대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서 정묘·병자호란을 치른 후 어영대장 휘하에 7천명의 군사가 배속되었고, 효종 때에는 북벌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이 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삼으면서 2만 1천명으로 늘렸다.

어영청은 이 당시 별초군(別抄軍)과 기병(騎兵)으로 조직된 정예군으로서 경상·전라·충청·강원·경기·황해도에 배치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순조 이후 어영청은 장어영(壯御營)·총어영(總御營) 등으로 바뀌었다가 고종 31년(1894)에 폐지되었다.




52) 지석영선생집(池錫永先生家)




종로구 낙원동 17번지에는 조선말에 종두(種痘)를 처음 실시하여 천연두를 없애게 한 의사이자, 관료이며 국어학자인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1855~1935)선생이 살았다.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난 지석영선생은 일찍부터 서양의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그의 스승인 박영선이 강화도조약 후 일본수신사로 가게되자 종두법에 관한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여 ꡔ종두귀감(種痘龜鑑)ꡕ을 얻은 후 부산의 일본해군이 세운 제생의원에서 2개월간 종두법을 배웠다.

그는 상경하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명의 주민에게 우리나라 최초로 우두를 놓아주었다. 그 후 1880년 재2차 수신사 일행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종두기술과 두묘(痘苗)의 제조·저장법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러나 임오군란 때 개화파로 몰려 체포하려 하므로 몸을 피했다가 정국이 가라앉자 종두 보급에 다시 노력하였다.

이듬해 188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지내고 한성부윤을 지냈다. 1899년 그의 건의로 관립 경성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교장으로 임명되어 의학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1905년 한글을 보급할 것도 주장하였다.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통분하여 모든 공직을 버리고 진료생활과 신의약 (新醫藥)보급에만 노력하였다.




53) 정 철선생 나신곳(鄭澈生家址)




전일에 장의동(壯義洞), 장동(壯洞)으로 불리었던 종로구 청운동 123번지 청운국민학교 자리에서는 조선시대 정치가이자 가사문학(歌辭文學)의 거장 송강(松江) 정 철(鄭澈;1536~1593)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재명이 높고 성품 또한 깨끗하고 맑아서 은사인 기대승은 ‘청결한 지조를 지닌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퇴계 이황은 ‘옛 간신(諫臣)의 기품이 있다’고 했다.

어려서 큰 누이가 인종의 귀인이었으므로 궁중에 자주 출입하여 동갑의 경원대군(明宗)과 친숙하였다. 그러나 을사사화에 처남 계림군(桂林君)이 관련되었으므로 그 일족으로서 화를 당해 가족과 같이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명종 17년(1562)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전라도암행어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관동별곡」 등을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 때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西人)의 거두가 되었고, 좌의정에 올라 광해군의 책봉(冊封)문제를 거론하였다가 선조(宣祖)의 노여움을 사서 강계로 유배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이 풀려 경기·충청·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의 작품으로는 「관동별곡」을 위시하여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의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54) 윤선도선생집 터(尹善道先生家址)




전일의 명례방 종현(鐘峴), 중구 명동 성당 부근은 옛부터 명당으로 이름난 곳이어서 풍수지리학에서 연소형(燕巢形)이라고 손꼽았는데 이곳에는 조선 인조 때 정치가이자,시조작가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살았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남인의 거두로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을 좋아하였는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백부의 양자가 되어 해남(海南)에 내려가 살았다. 진사시에 합격한 후 광해군 8년(1616)에 집권한 북인의 실정(失政)을 밝히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다.

8년 후 인조반정으로 풀려난 후 인조 11년(1633)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으나 서인들에 의해 모함으로 파직되어 해남으로 다시 낙향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욕되게 생각하여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에 정착한 후 자연을 벗하여 「어부사시사」 등 많은 시조를 지었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후 서울에 돌아아서도 왕에게 문안을 드리지 않았다는 죄로 인조 16년(1638)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효종이 즉위하자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서인들에 의하여 밀려나 다시 낙향하였으며, 1660년 효종이 죽자 조대비의 복제(服制)에 대한 예론(禮論)문제로 논쟁하다가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가인(三大歌人)으로 꼽히며 가사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가 있다.




55) 주자소 터(鑄字所址)




주자소는 중구 (구)주자동 4~7번지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에 활자를 주조하여 책을 인쇄하던 관아였다. 이에 따라 주자동이란 동명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고려시대의 서적원(書籍院)을 이어받아 태종 3년(1403), 왕명에 의해 승정원 직속으로 주자소를 설치되어 궁궐 내의 교서관(校書館)을 내관(內館), 주자소를 외관(外館)이라 하였다. 이 해 2월부터 수개월 동안 ‘계미자(癸未字)’ 약 10만개의 활자를 주조하여 책을 인쇄하였다.

태종 5년(1405)에 한양에 다시 천도하면서 이 곳 주자동에 주자소를 두었는데 세종 17년(1435)에는 경복궁 내로 이전하였는데 세조 6년(1460)에 교서관에 병합시켰다.

그 뒤 정조 18년(1794)에 규장각과 인쇄를 맡는 교서관이 떨어져 있어 불편함으로 교서관을 돈화문 밖으로 옮기게 하고 주자소를 분리시켜 창경궁의 홍문관 자리에 설치하고 활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정조 20년(1796)에는 이 곳에서 ‘정리자(整理字)’로 큰 활자 19만자와 작은 활자 14만자를 구리로 주조하였다.

철종 8년(1857) 화재로 ‘정유자’ 등의 활자가 불타버리자 그 이듬해에 ‘한구자’, ‘정리자’를 다시 주조하였다.




56) 광나루터(廣津址)




현재 광진구 광장동 광진교(廣津橋)가 놓인 한강변에는 서울과 남쪽지방을 잇는 배가 닿는 나루터가 있었다.

광나루는 일명 너븐나루, 광장진(廣壯津), 양진(楊津), 광진도(廣津渡)라고 불리우는데 옛부터 한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으며 외교·문화의 통로로서의 기능이 매우 컸다.

그러나 광나루가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천도하면서부터 였다. 한양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각도 산물이 집산되면서 광나루를 오가는 행인들이 빈번해졌다. 이에 따라 조선 초 태종 때에는 이 나루에 도승(渡丞)을 배치하여 범죄자를 색출하거나 나룻배를 관리하였다. 광나루는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하는 선비나 낙향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자 전국의 기생들이 모여들어 오가는 행인들의 마음을 낚기도 하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조세(租稅)를 운반하는 조운(漕運) 실시 때 출발기점 창고가 있어서 좌도수참전운판감(左道水站轉運判監)이 겸직으로 이 지역의 조운을 관장하였다.

광나루에는 4척의 나룻배와 그에 따른 진부(津夫)가 배속되었으며 이들에게는 소정의 농토가 지급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3정(三政)이 문란해 지면서 세력있는 양반들이 토지를 탈취하고 나룻배를 강점함으로써 나루의 관리와 운영이 부실해져 갔다.

일제 때인 1936년에 광진교가 놓이면서 이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하였다.




57) 송파나루터(松坡津址)




송파나루는 경기도 광주부(廣州府) 서북쪽 20리 지점, 현재 석촌호수 남쪽에 위치하였던 조선시대  한강변 나루였다.

이 나루는 전에 도성을 나와 살곶이다리를 건너 신천진(新川津)을 지나 샛강을 건너 도달하는 나루로서 광주·이천을 거쳐 3남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다. 조선 초에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세종 21년(1438)에 나루로 지정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3남지방의 각종 상품과 특산물이 이 나루에 집산되므로서 물물교환이 성행하여 송파시장이 형성됨으로써 270여 객주(客主)·여각(旅閣) 등의 각종 상인들이 모여들어 전국의 15대 상설시장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장날이면 한강을 통해 80여척의 배가 송파나루에 정박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던 말행상(馬行商)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3남지방에서까지 소장사들이 이곳까지 소를 끌고 올라와 거래했고, 또한 서울의 푸줏간 주인들이 소를 사기위해 이곳에 몰려 들었다. 따라서 영조 34년(1758)에 시전상인들이 그들이 파는 물건과 송파장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이 같으므로 해마다 이익이 줄어 타격이 크자 이를 조정에 항의했다.

이 나루는 조선시대 역대왕들이 선·정릉 등의 능을 찾기 위해 송파진을 이용했으므로 송파진의 업무가 번잡했으므로 종9품의 하급관리인 도승(渡丞)이지만 사대부 집안으로서 사리에 밝은 사람을 특별히 골라 이 나루에 배치했다. 그리고 임진, 병자 양난 이후에는 국가에서 군사 요충지로 여겨 송파진(松坡鎭)을 설치하여 군사를 배치했다. 즉 송파진이 삼전도보다 비중이 커져 삼전도 별장 대신 송파진 별장(松坡鎭別將)으로 삼전도, 광나루, 신천나루를 아울러 관장하게 하면서 9척의 관선(官船)을 운영하게 하였다.

  송파나루는 1971년에 잠실섬 물막이 공사로 한강의 물길이 지금과 같이 흐르게 되고, 석촌호수가 생기는 외에 그 이듬해에 잠실대교가 놓이므로서 그 기능은 물론 자취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58) 동재기 나루터(銅雀津址)




일명 동작진(銅雀津) 또는 동작도(銅雀渡)로 불리우는 동재기 나루는 ꡔ신증동국여지승람ꡕ에 보면 과천현(果川縣) 북쪽 18리에 있었다고 하니 현재 반포아파트 서편, 이수천(梨水川) 하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수심이 깊어 나루 부근에는 모로리탄(毛老里灘)과 기도(碁島)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나루는 서울에서 과천을 지나 3남지방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였으므로 조선후기에는 많은 사람이 이용하였다.

동재기 나루는 원래 인근의 노량진 관할 하에 있어서 몇척의 사선(私船)만이 비치되어 불편하였는데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이 곳에 별장(別將)을 배치하였으며, 영조 22년(1746)에는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관 받음으로써 나루터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선 후기 철종 8년(1857)에 이 곳에 배다리(舟橋)를 만들어 왕이 인릉(仁陵;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을 찾기도 했는데 1917년에 한강인도교가 놓이면서 나루의 구실을 상실하게 되었다. 현재 이 나루 부근에는 1984년에 동작대교가 놓여졌다.




59) 목멱산 봉수대 터(木覓山 烽燧臺址)




남산을 조선시대에 목멱산, 인경산(引慶山), 열경산(列慶山)이라고 칭했는데 목멱산은 정상에 춘추로 국가에서 초제(醮祭)를 지내는 목멱신사(木覓神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산 정상에 위치한 목멱산 봉수대는 서울에 있다 하여 일명 경봉수(京烽燧)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봉수를 매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하는 중앙봉수소였다. 봉수는 수십리의 거리를 두고 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피워 신호하였다. 봉수는 한번에서 다섯번까지 올려 변경의 상황을 알렸다.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제1봉~제5봉의 5개소가 있었다. 제1봉은 함경·강원·경기를 거쳐오는 봉수, 제2봉은 경상·충청·경기를 거쳐오는 봉수, 제3봉은 평안·황해·경기의 내륙을 거쳐오는 봉수, 제4봉은 평안·황해도의 해로(海路)와 경기의 육로를 통해오는 봉수, 제5봉은 전라도의 해안과 충청도 내륙 및 경기 해안을 거쳐오는 봉수를 받았다.

목멱산 봉수대는 한양으로 천도한 후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5백여년간 존속되었다. 이 봉수대는 종전까지 15명이었던 봉수군을 세종 28년(1446)에 20명으로 늘려 상·하(上下) 2번(番)으로 나누어 소(所)마다 2명씩 근무하게 하였다.

현재 남산 정상 케이블카 정류장 위에는 서울시가 봉수대를 복원하였다.




60) 북평관 터(北平館址)




현재 종로구 종로 6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서쪽자리는 조선시대 여진(女眞)사신을 유숙하기 위해 설치한 북평관이 있었다.

원래 야인관(野人館)이라 부르던 것을 세종 20년(1438)에 북평관으로 고쳤으며 조선 중기에 폐쇄되었다. 조선왕조는 여진족에 대해서 교린정책(交隣政策)의 하나로 조공과 귀화(歸化)를 장려하는 한편 추장들에게 만호(萬戶) 등의 명예 군직(軍職)을 주고, 서울에는 북평관을 두어 유숙하게 하였으며, 이들이 토산물을 진상하면 그에 대한 회사물(回賜物)을 주어 보냈다.

북평관 터는 조선 초에 5부학당 가운데 동부학당(東部學堂)이 위치했다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자리의 유우소(乳牛所)로 옮겨 갔다.




61) 바위절 터(巖寺址)




강동구 암사동 한강변 산 23번지, 즉 현재 암사수원지 취수장 서쪽 언덕 위에는 3국시대 때 세워진 바위절(巖寺)이 있었다.

이 곳에는 신라 때 9개의 절이 있어서 구암사(九巖寺)라고 칭했는데 이 절이 강변 바위에 위치했으므로 「바위절」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초에 편찬된 ꡔ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ꡕ에 보면 「백중사(伯仲寺)는 하진첩(下津站) 동쪽에 있다」고 했으므로 암사는 백중사로 고쳐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암사동이라는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

바위절은 어느 때 훼손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는 구암서원이 세워졌고, 한강변에 있었던 작은 암자마저 상수도 건설로 도로를 내면서 사라졌다.

구암서원은 서원은 조선 중기 현종 8년(1667)에 고려말과 조선왕조 때 남다른 충의와 행실을 지닌 이 집(李集), 이양중(李養中), 정성근(鄭誠謹), 정엽(鄭曄), 오윤겸(吳允謙), 임숙영(任叔英) 등 여섯사람을 모셨다.

현재 이곳 서원 터에는 조선말 고종 33년(1896)에 이 집선생을 제사드렸던 자리임을 밝힌 비석이 남아있는가 하면 큰 주춧돌이 남아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가 되는 이 집(李集)은 고려말에 강동구 둔촌동 산 328번지의 1호에 일시 살았으므로 둔촌동의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62) 공암나루터(孔巖津址)




현재 강서구 가양동 한강변에 있었던 공암나루는 강 건너 행주(幸州)의 북포(北浦)나루와 이어지던 나루였다. 공암나루는 일명 공암도(孔巖渡), 공총(孔叢), 구멍바위나루라고도 불리었는데 이는 강변의 탑산(塔山) 아래 절벽에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어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 나루는 양화진과 더불어 양천(陽川)·강화에서 도성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으므로 3남지방의 산물(産物)이 하역되었지만 길손은 붐비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선(私船)만이 있었으나 조선후기에 국가에서 나룻배 5척을 배치하였고, 양화진 별장(別將)의 지휘를 받았다.

공암(孔巖)은 일명 ‘허가(許哥)바위굴’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양천 허씨(陽川許氏) 시조가 이 곳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이다.

공암나루 앞의 한강을 투금탄(投金灘)이라고 하는데 그 까닭은 고려 때 이조년(李兆年), 이억년(李億年)형제가 한양으로 오는 길에 줏은 황금덩이 2개를 나누어 가지고 배를 타고 건느다가 물속에 던졌기 때문이다. 즉 황금이란 물질 때문에 우애를 잃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생각에서 황금을 던졌던 것이다.




63) 양화진 나루터(楊花鎭址)




마포구 합정동 양화대교 북단에서 천주교 절두산순교기념관(切頭山殉敎記念館; 합정동 96-1)에 이르는 강변일대에는 조선시대에 도성에서 김포, 강화로 가는 나루터인 양화진이 있었다.

양화진은 한강나루, 삼전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나루의 하나로서 진선(津船) 외에 참선(站船) 15척이 있었으나 뱃사공들의 농간과 관리들의 감독 소홀로 나루 구실을 하지 못하여 길손들이 어선으로 나루를 건너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양화진 문제가 빈번히 제기되자, 조정에서는 관선(官船) 9척을 배치하고 도승(渡丞)을 두어 나루를 관리하게 하였다.

양화진의 나루를 뜻하는 양화진(楊花津)과 군사주둔지인 양화진(楊花鎭)은 구분되어야 하지만 그 위치는 잠두봉(蠶頭峰; 절두산) 아래에 같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는 양화진에 도승 대신 별장(別將)을 두고 진병(鎭兵) 100여명을 배치하였으며 어영청의 감독 하에 두었다.

양화진 일대는 이름 그대로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는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정자도 강변에 많이 세워져 있었으며, 나루터가 넓어 전국에서 조운선(漕運船)이 집결하였다.

조선 말 임오군란(1882) 후 청·일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화진을 외국인의 거주 및 통상(通商)할 수 있는 개시장(開市場)으로 규정하였다.  




64) 삼개포구(麻浦浦口)




  현재 마포대교 북쪽의 한강변은 전일에 영등포와 시흥, 인천으로 가는 길손들이 강을 건너는 삼개나루이며, 조선 후기에는 3남지방에서 물화(物貨)를 실은 배가 닿는 포구였다.

  삼개란 포구 이름은 마포(麻浦)의 순 우리말로 오늘날 마포대교가 놓이면서 여의도와 영등포로 나가는 경유지 및 주택가로서의 역할로 바뀌었지만, 조선시대에는 경관이 뛰어나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였다.

  ‘마포의 뱃놀이(麻浦泛舟)’는 조선 시대에 서울의 경치 좋은 10곳을 뽑은 경도십경(京都十景)의 하나로 손꼽히던 관광 명소였다. 이 때문에 마포는 일명 마호(麻湖)라고 불렀다. 강변에 수양버들이 늘어서고 전망이 아름다우니 풍류를 즐기려는 명사(名士)들이 이곳에 누각과 정자를 지어 놓고 시흥(詩興)을 돋구었다.

  또한 마포는 오강(五江)의 하나로 들어갔다. 오강은 뚝섬, 노량진, 용산, 마포, 양화진으로 한강변에서 운수·교통에 많이 이용되는 곳을 뜻한다. 주로 용산항(龍山港)이 세곡(稅穀)이나 주요 물자들을 하역하여 만리창, 군자감 등의 창고가 즐비했던 데에 비해 마포는 서울 장안의 생활 필수품을 공급하는 객주와 여각이 많았다. 이들은 경강상인(京江商人)으로 서울의 상권(商權)을 좌우했다.

  6·25전쟁 전만 해도 휴전선으로 한강 하구가 막히지 않아 황해의 만조(滿潮) 때에는 30톤급 기선도 출입할 수 있었다.  마포에는 젓갈과 소금, 건어물, 생선 등을 실은 많은 배가 드나들어 서울시민들에게 공급했다. 따라서 젓갈만 다루는 젓갈 객주가 있어 유명하였다. 특히 이 젓갈 객주는 인천, 속초, 장항, 군산, 흑산도, 법성포, 목포, 마산 등지와 거래하면서 서울 남대문 밖 칠패(七牌) 시장을 좌지우지했다.

  그 외에도 마포에는 무수리가 성했다. 이들은 객주, 상고들, 사공 등을 상대로 재수굿을 해주는 것으로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또한 보부상들은 마포에 와서 건어물과 젓갈동이를 받아다가 전국 8도의 시장을 누비면서 마포의 젓갈을 공급했다. 개항 이후에는 일본이 용산에 거점을 차지하자, 청나라와 서양 세력이 이곳을 차지하려고 한때 눈독을 들여 일찌감치 전차선을 놓기도 했던 곳이다.




65) 광흥창 터(廣興倉址)




와우산(臥牛山) 남동쪽의 마포구 창전동 402번지 일대는 조선시대 관원들의 녹봉(祿俸)을 보관, 지급하는 관아와 그 창고인 광흥창이 있었다.

광흥창은 고려 때부터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한 관아로 한양 천도 후 전국 각지의 조운선(漕運船)이 조세곡을 싣고 집결하는 서강(西江)연안에 두어졌다.

ꡔ대동지지(大東地志)ꡕ에 의하면 창천(倉川)이 그 근원을 모악(母岳) 서남쪽에 두고 남쪽으로 흘러서 와우산 광흥창 앞을 지나 한강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니 광흥창이 위치함으로 해서 창천이란 개천 이름과 창전동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에 저장하는 세곡(稅穀)은 해운으로 운송된 전라·충청도의 양곡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조선 초에 녹봉은 매년 1월·4월·7월·10월 네 차례 지급하였으나, 조선 후기인 숙종 28년(1701)부터는 매월 지급하였다. 경종 1년(1721)에 개정되어 조선 말까지 지급된 녹봉은 정1품은 쌀 2섬 8말과 콩 1섬 5말, 종9품은 쌀 10말과 콩 5말까지 각각 차등을 두었다.

이 당시 문관은 이조(吏曹)에서, 무관은 병조(兵曹)에서 발급한 지급의뢰서를 가지고 관원이 직접 창고에서 받아갔다.

따라서 전일에는 이 곳 광흥창을 중심으로 많은 관리들의 가솔(家率)이 모여 살게되어 ‘서강서반(西江西班)’이란 말이 생기고 취락지가 발달하였다.




66) 노량진 나루터(露梁鎭津址)




현재 한강대교가 놓인 남쪽, 동작구 노량진동 한강변에 노량진 나루터가 있었다.

‘노들강변이란 민요도 있지만 옛부터 수양버들이 강변에 울창하여 경치가 아름다와 노들나루라고 부르고, 노도진(露渡津)·노량진도(鷺梁津渡) 등으로 불리운 이 나루는 본래 용산구 서부이촌동 강변에 위치하였는데 서울과 시흥·수원을 연결해 주는 길목에 있었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이용했던 나루이지만 조선 초부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여 도승(渡丞)을 배치하여 나루의 관리를 맡게하고 수상한 자의 검문을 담당하였다. 그러자 대부분 사람들은 배삯을 내고서도 사선(私船)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곳의 나룻배는 10척이 있었고, 관선(官船)은 15척이 배속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에는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에 이장하였으므로 수시로 능행(陵行)길에 오르게 되면 한강을 도강(渡江)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노량진에 배다리, 즉 주교(舟橋)를 가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주교절목(舟橋節目)이 마련되고 주교사(舟橋司)란 관아를 설치하였는데 배다리를 놓기 위해서는 많은 배와 장정들이 동원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개화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노량진 나루에도 1900년에 한강철교가 놓이고, 이어서 1917년에 한강인도교가 설치되면서 나루의 기능은 사라져 그 이름만 노량진동으로 남아 있다.

전일에 노량나루는 황해안 지방에서 올라오는 각종 어물과 개성·인천에서 들어오는 인삼 등의 짐이 부려졌다.




67) 서빙고 나루터(西氷庫津址)




현재 용산구 서빙고동 잠수교 북쪽 입구에 있었던 서빙고 나루는 조선시대 서울과 수원으로 통하는 길목의 도선장(渡船場)이다.

조선 초에는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 사선(私船) 두세척이 있어서 배삯을 받고 한강을 건네 주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부터 사람들의 이용이 많아 지면서 나루터로서 주목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훈련도감 관할 하에 한강진에서 진선(津船) 6척을 배속시켜 강남지방과의 내왕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 나루에는 남한강의 세곡선(稅穀船)이 기착하기도 하였다.

이 나루의 명칭이 된 서빙고는 조선시대에 동빙고와 같이 국가에서 얼음을 보관하던 빙고(氷庫)로서 태조 때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8개의 빙고가 있어서 겨울에 얼음을 떠서 보관하였다가 봄부터 가을까지 궁중,문무백관 및 환자나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68) 독서당 터(讀書堂址)




현재 응봉산 아래 성동구 옥수동 244번지 동쪽, 주택이 세워진 곳에는 조선 초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설치한 전문 독서연구기구인 독서당이 있었다. 이 까닭에 옥수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라고 부르고 있다.

독서당은 조선 초 세종 8년(1426) 12월에 집현전 학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실시한 것이 효시(嚆矢)였다. 그 후 성종 때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여 용산강변에 독서당을 설치하였고, 연산군 때 폐지되었던 것을 1507년 중종 때 독서당제도를 부활하여 동대문구 숭인동의 정업원(淨業院)을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곳이 독서당 장소로서 적합치 않다는 주청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중종  년(1517)에 두모포, 현재 옥수동 강변의 정자를 고쳐 지어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하였다.

이 동호독서당은 일명 호당(湖堂)이라 하여 75년 동안 학문연구와 도서열람의 도서관 역할을 수행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일시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이 괄의 난, 병자호란 등으로 기능이 정지되고 그 후 영조 때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정조 때 규장각(奎章閣)이 세워짐에 따라 독서당의 기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독서당이 폐지된 후에는 이 자리에 부군당(府君堂)이 세워져 그 앞에 「공부자도통고금연원기념비(孔夫子道統古今淵源記念碑)」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69) 뚝섬나루터




현재 성동구 성수동 2가 한강변 뚝섬 도하선 선착장 부근에 뚝섬나루가 있었다.

일명 독백(禿白)이라 불리운 이 나루는 영동대교가 놓이기 전에 봉은사(奉恩寺)와 청숫굴· 송파·삼전도 등으로 건너는 길목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나루에 경상도, 강원도의 세곡(稅穀)의 운송을 위하여 선착장을 두어 세곡선을 관리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강원도에서 내려오는 뗏목이 하역되어 서울에 목재와 연료를 공급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였다.

이 나루 남쪽에는 33대 사찰의 하나인 봉은사가 있으므로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서울의 불교신자들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나룻배를 많이 이용하였으며, 일제 때부터 나루 부근의 수영장 및 유원지가 마련되면서 동대문에서 왕래하는 기동차를 이용한 서울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았다.




70) 동학당 터(東學堂址)




현재 종로구 종로 6가 121번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서쪽에는 조선시대 서울 각 부(部)에 설치된 중등교육기관의 하나인 동부학당(東部學堂)이 있었다. 그런데 세종 20년(1438)에 여진(女眞)사신을 유숙하기 위해 설치한 북평관(北平館)이 들어서면서 동부학당, 즉 동학당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자리(종로 6가 33번지)의 유우소(乳牛所)로 옮겼다.

조선 건국 초에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정종 2년(1400) 개성에 머물 때 동학당과 서학당이 설치하였는데 학당 건물을 갖추지 못해 임시로 동학당은 순천사(順天寺) 건물을 빌려썼다가 승려들과 여러번 충돌하였다. 동학당의 건물은 언제 마련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세종 17년(1435) 8월에 왕이 건물을 보수하라고 명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독립된 건물을 이 곳에 마련한 것을 알 수있다. 태종 11년(1411)에 서울 5부(五部)에 각각 학당을 설치하여 5부학당이 설치되었으나 세종 27년(1445)에 북학당을 폐지하여 4부학당이 되었다.

4부학당은 성균관의 부속 교육기관으로, 정원이 100명이며 10세 이상이 되면 양반과 상민의 자제가 입학하여 ꡔ소학(小學)ꡕ과 ꡔ4서5경(四書五經)ꡕ을 교육하였다. 15세가 되어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진학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으로 동학당 건물이 소실되자 광해군 2년(1610)에야 중건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방의 향교(鄕校)와 같이 중등교육기관인 서울의 4부학당은 조선 말 고종 31년(1894)까지 존속되었다.




71) 서학당 터(西學堂址)




현재 중구 태평로 1가 60~61번지에는 조선시대 서울 각 부(部)에 설치된 중등교육기관의 하나인 서부학당(西部學堂)이 있었다. 이에 따라 이 부근의 고개를 서학재(西學峴)로 불렀다.

조선 건국이 되면서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정종 2년(1400) 개성에 머물 때 동학당과 함께 서부학당, 즉 서학당이 설치되었는데 학당 건물을 갖추지 못해 임시로 미륵사(彌勒寺) 건물을 빌려 썼다가 승려들과 여러번 충돌하였다. 그 후 한양 천도 후 한성부 북쪽의 경고(京庫)를 사용하였으며 세종 17년(1435)에 독립된 건물을 이 곳에 마련하였다.

4부학당은 성균관의 예속된 학교였으므로 성균관의 교관이 파견되었으며 학당의 잡무를 처리하는 서리(書吏)는 물론 노비까지도 성균관 소속이었다. 학생들의 성적은 학당에서 5일마다 시험을 치르고 예조(禮曹)에서는 매월 학습한 내용을 고강(考講)하여 평가하여 1년의 성적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학당 건물이 소실되었는데 선조 40년(1607) 9월 이전에 중건되어 조선 말 고종 31년(1894)까지 존속되었다.




72) 남학당 터(南學堂址)




현재 중구 필동 1가 30번지, 전일 영희국민학교 자리에는 조선시대 서울 각 부(部)에 설치된 중등교육기관의 하나인 남부학당(南部學堂)이 있었다.

남부학당, 즉 남학당은 태종 11년(1411) 6월에 예조참의 허조(許稠)에 건의에 의해 이 곳에 독립된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9월에 완성하였다. 남학당은 5부학당 중에서는 처음으로 독립적인 학당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종 1년(1419)에는 개성에서 폐사(廢寺)의 목재와 기와를 옮겨와 남학당의 동서재(東西齋)를 증축하였다.

세종 27년(1445) 이후 북부학당이 폐지됨으로써 5부학당이란 표현 대신 4부학당이란 말이 나타나며, 4부학당은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토지·노비 및 어장(漁場)의 수입을 하사받아 교육 비용에 충당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남학당은 소실되어 광해군 2년(1610) 이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말 고종 31년(1894)까지 존속되었다.

남학당의 옛 터는 일제 때에도 남아있어 깨진 기와조각이나 주춧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73) 중학당 터(中學堂址)




현재 종로구 중학당 88번지에는 조선시대 서울 각 부(部)에 설치된 중등교육기관의 하나인 중부학당(中部學堂)이 있었으므로 중학동이란 동명과 중학천이라는 개천이름이 남아있다.

중부학당, 즉 중학당은 조선 초 태종 11년(1411) 11월에 5부학당을 설치함에 따라 마련되어 남부학당의 건물을 빌려 쓰다가 세종 4년(1432) 12월에 이 곳에 독립된 학당 건물이 신축되었다. 그 후 북부학당의 학생수가 줄어들어 폐지하고 중학당에 합쳐졌다.

임진왜란으로 4부학당은 소실되어 국가 재정상 복구가 용이하지 않아 선조 34년(1601)에야 중학당이 먼저 중건되었다. 중건된 곳은 전일에 위치하던 곳이 아닌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의 집 서당 자리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학생수가 격감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조선말에는 관학(官學)이 부진하여 신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 소멸되었다. 그런데 신교육기관은 4부학당의 이름을 따서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74) 한강진 나루터(漢江鎭津址)




현재 한남대교가 놓인 북쪽 한강변은 조선시대에 강남의 사평(沙平)나루를 잇는 한강진 나루가 있었다.

한강나루는 송파나루와 노량나루와 함께 3진의 하나로 조선시대에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빈번했던 큰 나루였다. 한남동 앞의 강을 전일에는 한강이라 하여 이 곳 나루를 일명 한강도(漢江渡)·사수도(沙手渡)·사리진도(沙里津渡)·사평도(沙平渡)라고 하였는데 신라 때는 북독(北瀆)이라고 하여 이 곳에서 큰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 때는 사평도라 하여 이 곳에 나룻배를 배치하여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이 나루는 건너편의 사평나루를 거쳐 말죽거리·판교참(板橋站)을 지나 수원·용인 등3남지방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으므로 국가에서 별감(別監)을 파견하여 인마(人馬)의 통행을 검문하고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이 곳이 도성과 가장 가까운 관계로 한강 상류의 송파진(松坡鎭), 하류의 양화진(楊花鎭)과 함께 한강변의 방어를 위하여 영조 29년(1753)에 훈련도감 소속으로 한강진(漢江鎭)이 설치되었다. 정조 14년(1790)에는 장용영(壯勇營)으로 이속되고, 순조 2년(1802)에는 다시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




75) 독서당 터(讀書堂址)




전일에 마포장(麻浦莊)이 있었던 용산구 청암동 168-8번지 산등성이에는 조선 초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설치한 전문 독서연구기구인 독서당이 있었다.

독서당은 조선 초 세종 8년(1426) 12월에 집현전 학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자택에서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실시한 것이 효시(嚆矢)였다. 그러나 자택에서 독서에만 전념하기에는 어려웠으므로 세종 24년(1442)에 제2차 사가독서제를 실시할 때 신숙주·성삼문 등 6명을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도록 하였다.

그 후 성종 때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할 때에는 자택보다는 상설 국가기구인 독서당을 두는 것이 옳다고 하여 성종 23년(1492)에 귀후서(歸厚署) 뒷쪽, 이 곳 용산강변의 절을 확장하여 독서당을 설치하였다. 이 곳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여 독서수양에 적합한 장소였다. 성종은 ‘독서당’이라는 친필의 현액(懸額)을 하사하였으나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정지되었다. 일명 남호(南湖)로 불리운 용산의 독서당은 그 기능이 정지될 때까지 매년 젊고 뛰어난 문신 5~6명이 독서하였다.

조선 말에는 영국인 브라운이 이 곳에 세관감시소를 두고 한강을 거슬러 오는 배에 관세를 부과하였다.




76) 유성룡집 터(柳成龍家址)




서애(西厓) 유성룡(1542~160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의성에서 태어나 현재 중구 인현동 1가와 묵정동 지역인 남부 낙선방(樂善坊) 묵정동계(墨井洞契)에서 살았다.

그는 이 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여 친분이 두터웠다. 명종 21년(1566)에 문과에 급제한 후 도승지·예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으로 왕을 평양까지 호송하였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전란을 대비하여 권율을 의주목사,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하였다.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하고, 영의정으로서 4도(四道)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의주에서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치하도록 요청하여 1594년에 이 군사기구가 설치되자 그 책임자가 되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유성룡은 도학(道學)·문장·덕행·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의 저서 중에서 ꡔ징비록(懲毖錄)ꡕ과 ꡔ서애집(西厓集)ꡕ은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유성룡을 모신 안동 하회(河回)마을의 충효당은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77) 금위영 터(禁衛營址)




금위영은 중부 정선방(貞善坊), 현재 종로구 운니동 99번지(삼환기업 빌딩)에 있었던 조선 후기 궁궐의 경비는 물론 서울의 수비를 위한 군영(軍營)이었다.

금위영은 숙종 8년(1682)에 조직되어 본영은 금위영, 군대는 금위별대라고 하였다. 설치 당시의 금위군은 대개 입직·시위·순라 등의 3가지 임무를 수행했으나 해가 거듭됨에 따라 직무가 다양해져 도성 수어·건물 수축·개천 준설·소나무 보호 등을 수행하였다.

금위영이 조직되던 초기에는 1만 4,098명을 5부 20사(司) 100초(哨)로 편제하고 10번(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번상시켜 숙위(宿衛)하였다. 이 군영은 훈련도감·어영청과 더불어 국왕을 호위하고 수도 방어를 맡았던 핵심 군영의 하나로서, 그 임무가 막중하여 병조판서가 그 대장직을 겸임하였다가 영조 30년(1754)에 별도로 대장을 임명함으로써 독립된 군영이 되었다. 그 후 금위영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했을 때는 한 때 강화되기도 하였으나 고종 18년(1881)에는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가 1885년에 폐지되었다.

1908년 8월 군대 해산 후 일제는 금위영 건물을 은사수산장(恩賜授産場)으로 사용하다가 경술국치 후 1926년에는 이왕직 아악부(李王職 雅樂部)에서 썼으며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이 사용하였다.




78) 척화비(斥和碑) 있던 곳




종로구 관철동 보신각이 위치한 부근에는 조선 말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이 서양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침략한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와 미국 함대가 침입한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를 치르고 나서 외국과의 통상을 금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이 곳 종로네거리와 강화·동래·함양·경주·부산진 등 각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석 표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 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12글자를 새겨 놓았다.

그 후 임오군란(1882년)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이 당시 일본공사(日本公使)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이 곳의 척화비는 보신각 부근에 묻었다가 일제 때인 1915년 6월 보신각을 이전할 때 발굴되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보관하였다.




79) 맹사성집 터(孟思誠家址)




고불(古佛) 맹사성(1360~1438)은 조선 초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고려말·조선 초의 문신으로 종로구 삼청동 35-119번지에 살았다.

고려 말 우왕 12년(1386)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조선 초 태종 때 한성부윤과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세종 때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에 올랐다.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하기로 이름 높았다. 늘 출입할 때에는 소(牛)를 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정승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국가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그가 살던 고개이름을 맹감사현,맹현(孟峴)이라 하는데 공무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 피리를 불며 지냈다.


80) 의정부 터(議政府址)




의정부는 종로구 세종로 76-2번지, 정부합동 민원실 자리에 있었던 조선시대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서정(庶政)을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관청이었다.

일명 도당(都堂)·묘당(廟堂)·정부(政府) 또는 황각(黃閣)이라고 불렀던 의정부는 고려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정종 2년(1400) 4월에 이와 같이 고쳤고, 그 이듬해 태종 1년(1401) 7월에 관제 개혁으로 명실상부한 최고의 행정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태종 14년(1414)에 의정부의 권한이 강대하므로 업무의 일부를 6조(六曹)에 이양시키고 기구를 축소시키며 권한을 줄였다. 이에 따라 의정부는 외교문서의 고열(考閱)과 사형수를 복심(覆審)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어 전일의 넓은 청사는 빈집과 다름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22년이 지난 세종 18년(1426)에는 태종 초의 당시와 유사하게 개편, 강화하였다. 이로써 영의정이 국무총리격이 되어 그 밑에 좌의정·우의정·좌찬성·우찬성·좌참찬·우참찬이 두어지고 그 업무는 6조의 공사(公事)를 심의한 뒤 이를 국왕에게 품의하여 결재를 받아 돌려보내서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 뒤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는 동왕 1년(1455) 8월에 의정부의 서사(署事)를 폐지함으로써 그 지위를 격하시켰다.

한편 의정부 청사는 태종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한 후 창덕궁에 머물자 의정부와의 거리가 멀어 내왕이 불편하므로 의정부 조방(朝房)을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밖에 짓고 낭청(郎廳)과 서리를 보내어 머물게 하여 왕궁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그러나 3포왜란 등의 사건이 일어나자 명종 9년(1554)부터 중앙과 지방의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맡는 비변사(備邊司)가 조선말 고종 1년(1864)까지 설치·존속함으로써 의정부의 실권은 비변사로 이전되었다.

조선 말에 와서 고종 31년(1894)에 의정부를 내각이라 하여 폐지하였다가 고종 33년(1896)에 부할하여 다시 의정부라 하였으나 1907년 6월 내각(內閣)제도로의 환원과 함께 소멸되었다.

의정부 청사 자리는 갑오개혁 후 내부(內部)가 들어섰고, 일제 때 새로 건물을 짓고 경기도청이 사용하였다.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한 후 치안본부가 입주하였고, 이어서 서울시 경찰국 제1별관이 사용하다가 이전해 가자 이 건물을 헐어낸 후 정부합동 민원실과 정부종합청사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81) 제중원 터(濟衆院址)




한성부 남부(南部) 회현방(會賢坊) 동현(銅峴;구리개), 현재 중구 을지로 2가 181번지 한국외환은행 본점 뒷편에는 조선 말에 세워진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이 있었다.

앞의 광혜원 터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고종 22년(1885) 4월 10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왕립(王立) 광혜원(廣惠院)이 미국 북장로회 파견 선교의사(宣敎醫師) 알렌(安連, H. N. Allen)에 의하여 재동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세워졌는데 이 해 4월 23일에 제중원으로 개칭된 것이다.

즉 고종은 광혜원이 백성들의 치료에 공이 크다고 하여 제중원(濟衆院)으로 고치고 이 병원을 통리교섭아문(統理交涉衙文)안에 두도록 했다. 그러나 이 병원을 찾는 환자가 너무 많은데 비해 제중원이 너무 비좁아 이를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개업 2년 뒤인 1887년에 재동에서이 곳 구리개(銅峴)로 이전한 것이다. 이 곳은 갑신정변 후 국가에서 몰수한 주동 인물 홍영식(洪英植)의 집이었다.

그런데 이 해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 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떠났다가 귀국한 후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제중원 진료는 손을 떼게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내무아문에 속하게 된 제중원은 국가재정의 궁핍으로 지원이 줄어들자 운영난에 빠졌으므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운영이 넘겨졌다. 제중원은 광무 8년(1904) 9월에 미국인 세브란스(Severance, L.H.)의 재정지원으로 남대문 밖 용산구 도동(挑洞)에 현대식 병원을 세워 세브란스병원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 병원에서는 황해도, 평안도에서 13세부터 16세까지의 총명한 기생 2, 3명을 뽑아 병설(倂設) 여의원(女醫院)에서 의술을 익히게 했다.




82) 이항복집 터(李恒福家址)




현재 종로구 필운동 12번지 배화여자고등학교에는 조선 선조 때 문인으로 영의정을 지낸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이 살았다.

이항복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고, 죽마고우 한음 이덕형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권 율(權慄)장군의 이웃집에 살았는데 권 율장군이 기지와 재주가 뛰어남을 사랑하여 후일 큰 사위로 삼아 한 집에서 살다가 권 율장군은 행촌동 1번지로 옮기고 이 집을 물려 주었다.

이항복은 경치가 뛰어난 이 일대에 살면서 바위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를 새겨 놓아 현재도 남아있다. 그 후 이항복은 현재 원남동 지역인 호동(壺洞)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부모를 여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고 선조 13년(1580)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22년(1589) 예조정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렸고, 도승지로 발탁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5번이나 병조판서가 되어 병권(兵權)을 잡고 크게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33년(1600) 영의정에 오르고 다음해에 호종 1등공신이 되었다.

광해군 10년(1618)에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평민으로 격하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였다가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83) 염창 터(鹽倉址)




  3백년 전까지만해도 서울과 인근 지역에 소금을 공급하던 소금창고, 즉 염창(鹽倉)이 한강변인 강서구 염창동 산 29번지 3호에 있었다.

  ꡔ신증 동국여지승람ꡕ」에는 「양천현(陽川縣) 동쪽 8리 지점인 공암(孔岩) 근처에 염창이 있는데 소금을 모아 보관하는 창고」라고 염창의 위치를 소개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황해안과 남해안의 염전(鹽田)에서 조세(租稅)로 바칠 소금을 배에 싣고 올라와 이곳에 부렸다. 이 당시 염창에 운반된 소금은 국가용과 군사용 그리고 일반 판매용으로 구분되어 각각 저장, 보관하였다.

  전일에는 소금이 매우 귀한 물품이었으므로 국가에서 전매품(專賣品)으로 취급했다. 이에 따라 암거래가 성행하여 염전에서 부린 소금이 중도에서 빼돌려지거나 물에 녹아 버린 관계로 염창에 도착하면 분량이 줄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염창에 소속된 관원들과 양천현의 관리들이 이를 보충하기 위해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이에 양천현령(陽川縣令)이 염창을 다른 곳으로 이전해 줄것을 여러번 요청했으므로 17세기인 숙종 때 와서 이곳의 염창이 폐지되었다.

  소금은 서해안 연안에서 생산된 것을 최상품으로 꼽았으므로 염창 부근에서 거래되는 소금의 양은 적지 않았다. ‘하얀 염전에 물옷 입듯’ 소금 거래를 하기 위해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 들어 장시(場市)를 이루었다. 이곳에 운반된 소금이 많을 때는 소금더미에서 ‘임금 용안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어서 창고 하나만으로 부족하였으므로 세 곳에 나누어 각각 보관하기에 이르렀다.

  전일에 염창이 있던 곳에는 자연 뱃사람이나 소금 장수들이 모여들었으므로 이들을 상대로 객주(客主)가 들어서고, 주막이 생겨나게 되어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어 전해온다.




84) 삼전나루터(三田渡址)




현재 서울종합운동장 북쪽, 탄천 하구에는 조선시대 서울에서 광주의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한 삼전나루가 있었다.

이 나루는 일명 삼밭게·세밭나루·뽕밭나루라고 불렀으며 세종 21년(1439)에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나루, 노들나루와 함께 경강3진(京江三津)의 하나로 3척~6척의 관선(官船)이 배치되었고 진부(津夫) 10명이 배속되었다.

삼전나루는 그 기능이 커지면서 이 곳의 도승(渡丞)이 한명 배치되어 광나루도 관장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도승 대신 별장(別將)이 파견되고 이 나루는 어영청의 관할로 되었다. 또한 이 나루는 대모산 기슭에 태종·세종이 모셔진 헌릉·영릉에 이르는 능행로(陵幸路)의 길목이고, 성종이 묻힌 선릉도 있어서 중종 31년(1536)에는 왕의 능행을 위해 부교(浮橋)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 나루는 주로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였고 소와 말의 집결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이 나루에 마포 등지에서 싣고 온 젓갈류·어류(魚類) 등이 하역되어 인근 송파시장에서 판매되었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는 인조 14년(1636) 12월에 도성을 나온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기 위해 건느던 곳일 뿐만 아니라 40일 후 이듬해에는 이 곳에 설치한 수강단(受降壇)에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던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란 치욕의 역사현장이다. 그 후 인조 17년(1639), 청은 조선 정부에 대해서 수강단을 설치하였던 곳에 청태종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울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비석이 세워짐으로써 조선은 청의 예속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 비석은 그간 몇차례 옮겨졌다가 현재는 석촌동에 위치해 있다.

이로 인해 삼전도는 치욕의 장소라 하여 기피하여 인근에 송파나루가 새로 개설되었다는 설도 있다.




  85) 서빙고 터(西氷庫址)




서빙고는 현재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기슭 한강변에 두었던 조선시대 국가에서 서울에 설치, 운영하였던 얼음창고이다.

얼음을 보관하던 이 빙고(氷庫)는 태조 때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8개의 움막집 형태로 지은 빙고가 있어서 겨울에 얼음을 떠서 보관하였다. 이 곳의 빙고는 옥수동의 동빙고보다 12배, 내빙고(內氷庫)의 3배나 규모가 커서 총 13만 4,974정(丁)의 얼음을 저장할 수 있었다.

대개 12월(양력 1월)에 결빙(結氷)된 4치(寸) 이상의 얼음을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3월부터 빙고를 열고 반출하기 시작하였다. 얼음을 저장하거나 반출하기 전에는 먼저 현명씨(玄冥氏)를 모신 사한단(司寒壇)에 제사를 지냈다. 이 빙고에는 별제(別制)·별검(別檢)·서원(書員)·군사가 배정되었다.

동빙고가 국가 제사용의 얼음을 보관한 데 비해, 서빙고는 궁중, 문무백관 및 환자나 죄수들에게 나누어 줄 얼음까지 저장하였으며 시설 관리를 위해 연간 쌀 1,000여석의 예산을 배정 받았다.




86) 제생원 터(濟生院址)




현재 종로구 계동 현대빌딩 자리에는 조선 초기에 서민들의 질병 치료를 관장하던 의료기관인 제생원이 있었다. 이 곳에 제생원이 있었던 관계로 제생동(濟生洞)·계생동(桂生洞)이라 하다가 계동이라 하게 되었다.

조선 초 태조 6년(1397)에 조 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설치되어 의약, 특히 약재(藥材)의 수납·재배·보급과 의학교육 및 의학관계 서적 편찬사업을 맡아보는 외에 미아(迷兒)의 보호 등 광범위한 사회사업을 담당하였다. 즉 제생원은 전의감·혜민국과 함께 진료는 물론 약을 지어주는 외에 약초를 재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생원은 태종 6년(1406) 동녀(童女) 수십명을 선발하여 집맥, 침술(鍼術)을 가르쳐 부녀자들의 질병을 치료하게 하는 의녀(醫女)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세종 15년(1433)에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승문원(承文院)과 제생원이 위치한 곳이 도성의 주산(主山) 정맥(正脈)의 명당이므로 이곳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서 한 때 논란이 있었다. 그후 제생원은 세조 5년(1459) 5월에 혜민국에 합병되었다.

조선 후기에 숙종의 아들인 연령군(延齡君)의 사당이 세워져 계동궁(桂洞宮)이라 하였고,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인도로 고종과 민비가 일시 피신하기도 하였다.




87) 원각사 터(圓覺社址)




야주개(夜珠峴), 종로구 신문로 1가 58-1번지 일대에는 개화기의 사설극장인 원각사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인 원각사는 1909년에 이인직(李人稙)·박정동(朴晶東)·김상천(金相天) 등 3명이 협률사(協律社)를 이어받아 로마식 극장을 본떠서 건축하여 5백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원각사는 전속단체를 두어 명창(名唱) 40명과 가기(歌妓) 24명을 두고,판소리·민속무용 등 재래의 연희(演戱)를 주로 공연하였다. 또한 이인직의 작품 「은세계(銀世界)」·「설중매(雪中梅)」 등의 신연극을 공연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고충으로 운영권이 김시현에게 넘어가서 공연활동은 중단되어 전속 명창들은 해산되고 공회당으로 변모하였다가 1914년 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88) 육의전 터(六矣廛址)




종로 1가 54번지·종로 2가 14번지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시전(市廛) 중에서 전매특권(專賣特權)을 갖고 국역(國役) 부담의 의무가 큰 6종류의 상품을 파는 육의전이 있었다.

일명 육주비전(六注比廛)·육부전(六部廛)·육조비전(六調備廛) 등으로 불리운 육의전은 일반적으로 비단을 파는 선전(縇廛, 또는 立廛)·무명을 파는 면포전(綿布廛)·명주를 파는 면주전(綿紬廛)·종이를 파는 지전(紙廛)·모시와 베를 파는 저포전(苧布廛)·생선을 파는 어물전(魚物廛) 등을 일컬었는데 조선 말 고종 때에는 백목전(白木廛)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부터 시전은 국가에 납세의 의무가 있었지만 조선 후기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부터 국가의 주요 행사시의 경비와 중국에 파견되는 각종 사절의 세폐(歲幣) 및 수요품의 조달 등의 국역(國役)을 부담하게 되었다. 국역 부담의 시전 중에서 부담률이 높은 6개가 육의전인데 이들은 그 대가로 자금의 대여, 외부 압력으로부터의 보호, 난전(亂廛)을 금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으므로 마치 서양 중세의 길드(Guild)와 유사하였다.

어용상인 단체인 육의전이 나타난 것은 인조 15년(1637)에 중국에 보내는 방물과 세폐를 분담하면서부터로 본다. 육의전은 단일의 경제단위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 별개의 구성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각전(各廛)은 도중(都中)이라는 일종의 조합을 구성하고 있었다.




69) 군기시 터(軍器寺址)




군기시는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다고 하였으니 현재 서울시청과 서울신문사가 위치한 곳에 조선시대에 병기(兵器)와 기치(旗幟), 융장(戎仗), 집물(什物) 등을 제조하는 관아가 있었다.

조선 초 태조 1년(1392)에 군기감으로 설치되었다가 세조 12년(1466)에 군기시로 고쳐졌으며, 고려 말에 화약·화포의 제조로 왜구 소탕에 공이 많은 최무선(崔茂宣)이 조선 건국되면서 책임자가 되고. 그 아들 최해산(崔海山)은 부정(副正)이 되어 군기감의 청사를 건립하였다.

태종 17년(1417)까지 82칸의 여러 건물이 지어지고 그 후에도 증축했는데 여기서 많은 화약·활·화포를 제작, 장치하여 유명하였다. 군기시에는 화약을 다루는 기술자인 화약장(火藥匠)이 배속되어 있었고, 화기(火器)를 전담하는 10여명의 관원을 두었는데 이들은 양반 자제 중에서 기술이 정교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난 자를 뽑았다.

군기시 안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선조 13년(1508) 5월에 물줄기가 갑자기 한길 이상 높이 솟아 올라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군기시의 예속된 화약고는 소격서(昭格署; 현재 화동 24번지에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조선 말 고종 21년(1884)에 군기시는 기능을 상실하여 기기국(機器局)에 통합되고 10년 뒤인 고종 31년에는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군기시 앞에 군기시다리가 있었고, 이 곳에서는 국가 반역죄 등 중죄를 지은 죄인을 공개 처형하였다.




90) 한성임시정부 터(漢城臨時政府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각지에서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한성임시정부는 서울에 근거를 두고 설립하였다.

즉 1919년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1919년 4월 2일, 한남수(韓南洙) 등 뜻있는 인사들이 13도 대표가 모인 인천에서 정부 구성을 결의한 뒤 이어 4월 23일, 서울 도심에 수천명의 시민이 모인 국민대회에서 임시정부 선포식을 거행하여 이를 내외에 알렸다.

이 당시 한성임시정부는 약법(約法)을 제정 공포하고, 국민들에게 일제에 대항해서 납세와 사법행정상의 업무를 거부하게 하는 등 국정(國政)을 실질적으로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본 헌병경찰에 탐지되자 한성임시정부 관련자가 모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4월 8일, 한남수 등이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상해임시정부에 한성임시정부를 합류시켰다. 따라서 한성임시정부는 상해임시정부에 국내 국민의 의사를 모두 수렴해서 광복의 뜻을 정통성으로 연결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91) 규장각 터(奎章閣址)




현재 종로구 소격동 165번지 국군통합병원 뒤쪽에는 왕실의 계보(系譜), 친필, 서화, 고명(顧命), 유교(遺敎) 등을 보관·관리하던 조선시대의 규장각이 있었다.

원래 왕실의 문서는 홍문관(弘文館)이 보관하여 왔으나 폐지되면서 수십만권의 문서를 규장각에 보관하게 되었다. 일명 내각(內閣)으로 칭하는 규장각은 조선 후기 정조 즉위년(1776)에 설치되었다. 원래 규장각은 정조가 노론 벽파 등 반대파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혁신정치의 중추기구로서 설립하였으나 세도정치를 하던 홍국영(洪國榮)을 제거한 이후에는 정치의 연구 및 기획기관이 되었으므로 규장각의 각신들은 승지 이상으로 국왕과 친밀하였다.

원래 ‘규장(奎章)이란 왕의 어필과 어제(御製)를 의미하며 정치적·문화적 기구라고 할 수 있다. 규장각은 국내외 서적의 수집·편서·간서에 있어 구심적인 구실을 하였고, 우리 문화재의 정리와 보관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규장각의 도서는 이왕직(李王職) 도서실에 일시적으로 보관하다가 이듬해에 조선총독부 취조국으로 넘어갔다. 이 때 도서는 10만 187책, 각종 문서는 1만 730책이 인계되었으며 이어서 총독부 참사관실, 1922년 학무국, 그리고 이어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는데 이 당시 15만 119권이 도서관에 옮겨졌다. 광복 후 이 도서들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인수하였는데 최근에  따로 규장각 도서관을 세워 보관하고 있다.




92) 비변사 터(備邊司址)




현재 창덕궁 앞의 종로구 와룡동 5번지에는 조선시대에 변방의 군사문제와 정치·경제·외교·문화 등 군국사무 전반을 담당하는 최고 기관인 비변사가 있었다.

비변사는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최고기관이었으므로 국왕이 궁궐을 옮길적마다 궁궐문 앞 가까이에 위치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이 창덕궁에 있게되면 이 곳에 위치하였고, 국왕이 경복궁에 머물면 종로구 세종로 50번지 남쪽에 위치하였으며, 국왕이 경희궁을 쓰게되면 종로구 신문로 2가 50번지에 위치하였다.

비변사는 중종 5년(1510) 3포왜란이 일어나자 3정승과 병조판서, 국경지방의 요직을 거친 인물인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의 모임을 임시적으로 이러한 명칭을 붙였다. 이어서 여진족의 침입을 당했을 때도 임시로 비변사를 설치하였는데 중종 17년(1522)에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의 방어대책을 강구하면서 그 기능이 강화되었다. 명종 10년(1555)에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면서 비변사는 상설기관이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기관으로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비변사의 기능이 강대해짐에 따라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조선 말 고종 원년(1864)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비변사는 종전대로 외교·국방·치안관계만을 관장하게 하고, 나머지 업무는 모두 의정부에 넘기게 함으로써 비변사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이어서 그 이듬해에는 비변사를 폐지하여 그 업무를 의정부에 이관하고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켜 군사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93) 사간원 터(司諫院址)




북부 관광방(觀光坊), 즉 경복궁 건춘문 동쪽의 종로구 사간동 62번지에는 조선시대 왕에 대한 충고기관으로 왕의 과실(過失)과 여러 정령(政令)의 득실을 간언(諫言)하는 일을 담당한 관아인 사간원이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이 곳 일대를 간동(諫洞), 일제 때에는 사간동이라 하였다.

사간원과 사헌부는 언론양사(言論兩司), 홍문관을 합하여 언론삼사(言論三司)라 하여 조선시대에 간쟁(諫諍)·논박(論駁) 언론을 담당하였다. 일명 간원(諫院), 미원(薇院)으로 불리운 사간원은 고려시대의 제도를 이어받아 태종 1년(1401)에 독립된 관아로 설치되어 조선 말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되었다.

사간원은 사헌부와 함께 대간(臺諫) 혹은 양사(兩司)로 불리면서 모든 관료들의 횡포를 견제하고, 왕권의 전횡(專橫)도 견제하여 정치 권력의 평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사간원은 의정부·육조·사헌부 등과 더불어 정치의 핵심기관으로서 그 기능이 원만히 수행되면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독주를 막고 균형있는 정치를 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기관이었지만, 권력이나 당파에 이용되어 폐단이 생기기도 하였고, 왕권의 탄압을 받아 그 기능을 상실한 때도 있었다.

연산군 때는 왕이 백관(百官)의 비위를 규찰하는 일은 사헌부가 맡고 있으니 사간원은 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폐하였으나 중종 초에 다시 설치하였다.





94) 사역원 터(司譯院址)




서부 적선방(積善坊), 현재 종로구 도렴동 98번지 부근에는 조선시대 외국어를 번역·교육시키고 통역을 담당하던 관아인 사역원이 있었다.

사역원은 조선 초에 고려시대의 제도를 이어받아 설치하였지만 오히려 그 기능을 확대하고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즉 태조 3년(1394)에는 중국어만 교육하다가 그 후 몽고어·일본어·여진어를 교육시켰다. 그러나 사역원은 태조의 뜻대로 사대교린의 업무를 전담하지 못하고 문서 작성은 승문원(承文院)이 담당하게 되었다.

사역원에는 관직에 있으면서 공부하러 온 강이관(講肄官), 문과에 합격하고 관직을 받지 못하고 공부하는 강예관(講隸官), 그리고 일반생도 등 세 종류의 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곳의 학생은 성종 13년(1482) 이후에는 천인(賤人)은 입학할 수 없었고, 향교의 생도나 양가(良家)의 자제, 중인이나 서얼(庶孽) 출신이 입학할 수 있었다.

조선 초에 사역원 학생들은 체아직(遞兒職)을 주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종신토록 녹祿)을 받을 수 있는 등 특전을 주다가 예종·성종 때에는 이 특전이 없어짐으로 인하여 한때는 학생들이 없어서 외국어교육이 거의 단절될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역대왕들이 사대교린의 외교정책 때문에 꾸준히 역학(譯學)을 장려하여 사역원 교육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95) 6·10독립만세운동 선창 터(獨立萬歲運動 先唱址)




6·10독립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융희(순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만세 시위를 일으킨 학생 중심의 민족독립운동이다.

이 해 4월 26일 융희황제가 승하했다는 비보를 듣고 나서 전문학교 학생 중심의 사직동계(社稷洞系)와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通洞系)는 순종 인산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고 격문을 인쇄하는 등 준비하였다.

인산일에는 2만 4천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여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고 있었다. 융희황제의 상여가 창덕궁을 떠나 종로구 종로 3가 단성사극장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中央高普生) 300여명이 전문학생 이선호(李先鎬)가 독립만세를 선창(先唱)하자 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격문이 살포되었다.

그리고 상여가 관수교를 지날 때 연희전문학생 50여명이 격문을 뿌리며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고, 이어서 을지로 5가, 6가 부근 및 동대문, 동묘, 신설동 부근에서도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자 일반 시민들도 이에 합세하여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었으나, 일제가 군대까지 동원하여 저지함으로써 실패하였다.

6·10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일어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감행하여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 주었고, 민족운동사의 하나의 큰 횃불이 되었다. 이 당시 서울에서 학생 210여명이, 전국적으로 1천여명이 일제에게 체포되어 106명이 취조 받았으며, 53명이 수감되었다.




96) 사헌부 터(司憲府址)




서부 적선방(積善坊), 현재 정부종합청사 남쪽인 종로구 세종로 80번지에는 조선시대 관료들의 부정과 실정(失政)을 감찰하는 관아인 사헌부가 있었다.

ꡔ경국대전ꡕ에 보면 사헌부는 정치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糾察), 풍속을 바로잡는 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펴주는 일, 외람되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일 등이 그 업무로 되어있다.

사헌부는 사간원, 홍문관과 같이 언론을 담당하는 3사(三司)의 하나로 고려시대 제도를 본받아 태조 1년(1392)에 설치되어 태종 1년(1401)에 변경되었으며 조선 말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되었다.

또한 사헌부는 사간원과 함께 대간(臺諫) 혹은 양사(兩司)로 불리면서 모든 관료들의 횡포를 견제하고, 왕권의 전횡(專橫)도 견제하여 정치 권력의 평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사헌부는 의정부·육조·사헌부 등과 더불어 정치의 핵심기관으로서 그 기능이 원만히 수행되면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독주를 막고 균형있는 정치를 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기관이었지만, 권력이나 당파에 이용되어 폐단이 생기기도 하였고, 왕권의 탄압을 받아 그 기능을 상실한 때도 있었다.

사헌부는 형조(刑曹)·의금부와 함께 죄를 범한 관원을 국문(鞠問)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소송을 재판하는 결송(決訟)기관이었다.




97) 훈련도감 터(訓練都監址)




훈련도감은 경희궁 동쪽,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현재 종로구 신문로 1가 58번지로서 조선후기에 군사훈련 외에 수도 방위와 국왕의 경호업무 등을 담당하던 군영(軍營)이었다.  

일명 훈국(訓局)으로 줄여서 부르는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에 포군(砲軍)을 양성하기 위하여 명나라군에 화포(火砲) 교습을 의뢰, 조치한 것이 계기가 되어 1개월 후인 선조 26년(1593) 8월에 왕명으로 설치되었으며 이 해 10월에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정예군사의 양성을 위해 조직체제를 갖추었다.

훈련도감은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로 구분되어 조직되었는데 초기에는 약 1천명이었으며 군사 1인당 한달에 쌀 6말의 급료를 지급하는 군사로 모집되어 일반 군사와는 달랐다. 1602년 삼수미(三手米)를 거두게 되면서 군사가 2천명으로 늘어났고, 병자호란 직전에는 5천명을 넘게 되었다.

훈련도감은 5군영 중에서 중심군영으로 전일의 5위(五衛)가 담당하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으나 조선 말 고종 18년(1881)에 군제개혁 때 별기군(別技軍)이 설치되면서 신식군대 조직이 이루어지자 그 이듬해에 결국 폐지되었다.




98) 전의감 터(典醫監址)




현재 종로구 견지동 39번지, 안국동 로터리 부근에는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쓰는 의약의 공급과 국왕이 하사하는 의약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아인 전의감이 있었다. 이에 따라 이 일대를 전동(典洞)이라 하였다.

조선 초 태종 원년(1401)에 설치된 전의감은 의료행정 및 의학교육을 담당하는 중추기관으로서 약재(藥材)의 재배와 이를 취급하는 외에 의원을 취재(取材)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ꡔ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ꡕ에 보면 선조 36년(1603)에 전의감에 치종청(治腫廳)을 부설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종기(腫氣)를 따로 치료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치종청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에 혜민서에 소속시켰다.

고려 때 태의감, 사의서, 전의서 등으로 불리운 것이 조선이 건국하자 전의감으로 고쳐졌다. 조선 말 갑오개혁 때 전의감은 태의원(太醫院)으로 개칭되었으며, 서양 의술의 보급으로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그 이전 1884년에는 근대식 우편제도를 관장하는 우정총국(郵征總局)이 들어섰는데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개화파가 이 곳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99) 경시서 터(京市署址)




현재 탑골공원 동쪽, 종로구 종로 2가 44번지에는 조선시대에 서울의 시장(市場)과 점포를 단속하고 물가를 조절하는 관아인 경시서가 있었다.

경시서는 본래 중부 견평방(堅平坊;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하였다가 이전해 왔다.  조선 건국 후 태조 1년(1392)에 고려시대 제도를 계승하여 경시서를 설치한 후 조선 말 갑오개혁(1894) 때 폐지되었다. 물가 조절 및 상인들의 감독, 세금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 경시서는 그 뒤 문물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화폐의 유통과 말(斗)·자(尺)·저울 등의 도량형(度量衡)의 관한 업무도 관장하였다.

그 후 세조 12년(1466) 관제 개혁 때 평시서(平市署)로 고쳐졌고, 성종 때 반포된 ꡔ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종5품 아문으로서 영(令) 1명, 직장(直長) 1명, 봉사(奉事) 1명을 두게 되어 있다.




100) 정도전집 터(鄭道傳家址)




종로구 수송동 146번지 종로구청이 자리한 곳에는 조선 개국공신 삼봉(三峰) 정도전(1337~1398)이 살았다.

고려 말 단양에서 출생한 정도전은 이 색(李穡)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정몽주·이숭인 등과 교유(交遊)하였고, 136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우왕 1년(1375)에 이인임(李任仁) 등의 친원(親元) 외교정책을 반대하다가 전라도 나주목으로 유배되었고, 이어서 9년간 유랑 생활 끝에 동북면 함주의 이성계(李成桂)를 만나 인연을 갖기 시작하였다. 명나라에 다녀 온 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개혁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 중 이성계가 해주에서 다치자 정몽주 등의 탄핵으로 예천 감옥에 투옥되었다. 정몽주가 이방원 일파에게 격살 당하자 풀려나와 조 준·남 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 개창에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왕조가 세워지자 개국 1등공신으로 정권과 군사권을 아울러 가졌다. 이어 ꡔ조선경국전ꡕ을 찬진하고 태조 3년(1394)에 한양 천도를 계획·실천하였으며, 요동(遼東) 수복운동을 벌여 군사훈련 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ꡔ불씨잡변(佛氏雜辨)ꡕ을 저술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정치·사회의 기본 이념으로 삼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현재 종로구청 자리가 백자천손(百子千孫)할 자리라 하여 이 터에 집을 짓고 이곳 지명을 오래 산다는 의미로 수진방(壽進坊)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남 은(南誾) 등과 함께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방석(芳碩)을 옹호하여 세자로 삼고, 정실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를 죽이려 했다는 혐의로 태조 7년(1398) 9월, 한씨(韓氏) 소생의 왕자 이방원 등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기습을 받아 피살되었다.

이에 따라 집은 몰수되어 살림집은 제용감(濟用監), 서당 자리는 중학(中學), 마구간은 궁중에서 소요되는 가마·말·목장 등의 업무를 맡아 보는 사복시(司僕寺)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이 자리는 수송국민학교가 들어섰다가 폐교되고 종로구청과 종로소방서가 사용하고 있다.




101) 김옥균집 터(金玉均家址)




현재 종로구 화동 106번지에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조선 말의 개화파 지도자 고균(古筠) 김옥균(1851~1894)이 살았다.

김옥균은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7세 때 부사(府使)로 있던 당숙 병기(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20세 전후부터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고종 9년(1872)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교리·정원 등의 관직을 지내고 개화와 혁신의 뜻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개화당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1881년 일본의 선진 문물을 돌아보고 견문을 넓히고 있을 때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한 뒤 호조참판·외아문 협판의 요직을 지내면서 조선 제도의 대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해 9월, 수신사 박영효의 고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수신사 일행을 먼저 귀국시키고 본국으로부터 유학생들을 선발해 보내도록 하 여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다음 1883년 3월에 귀국하였다. 이어서 3개월 후 6월에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국채(國債)를 모집하려다가 민비 일파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 21년(1884) 8월, 청·불전쟁에서 청국이 패전하자 이를 계기로 삼아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킬 기회로 판단하였다. 김옥균은 그 해 10월에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정변에 협조해 주기로 하자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우정국(郵征局) 낙성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단행하여 일부 수구파의 거물을 처단하고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청국군 1,500명의 무력개입으로 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나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정부는 그를 오가사와라섬, 북해도로 귀양보냈다가 동경에 돌아왔다. 1894년 3월 청나라 상해로 망명하였으나 민비 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조선으로 옮겨진 그의 시체는 반역죄로 양화진에서 능지처참하였다. 갑오개혁 후 그의 죄는 사면, 복권되어 1910년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102) 김상헌집 터(金尙憲家址)




종로구 궁정동 2번지, 로마 교황청 대사관이 자리한 곳에는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이 살았다.

김상헌은 외가가 있던 중구 회현동에서 출생하여 윤근수(尹根壽)에게서 공부하고 선조 23년(1590)에 진사,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광해군 때 동부승지로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서인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조참의에 발탁되어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고, 대사간· 도승지를 역임하고,명나라에 다녀왔다.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을 당하자 화친을 배척하여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관직을 내놓고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 심양으로 끄려가서 6년 후 풀려나 귀국하였다. 이어서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었고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대로(大老)라고 존경하였다.

이 터에는 중종 때 서윤 김 번(金璠)이 살았는데 그의 삼촌인 학조대사(學祖大師)가 명당으로 잡아준 것이다. 그 후 김상헌의 손자로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이 살았다.




103) 토정지(土亭址)




마포구 토정동 한강변에는 조선 선조 때 문인이며 기인(奇人)으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이 살았으므로 이 부근을 토정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지함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 지번(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徐敬德) 밑에서 공부하였다. 선조 6년(1573)에 추천으로 청하(淸河; 현재 포천)현감이되었고, 다시 1578년 아산현감에 등용되어 걸인과 기인(飢人)들을 구제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으로 만든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으므로 ‘토정’이란 호가 붙게 되었다. 그가 의학과 복서(卜書)에 밝다는 소문이 퍼져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ꡔ토정비결(土亭秘訣)ꡕ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국을 두루 다니며 명당(明堂)과 길지(吉地)를 점지하였다.

ꡔ어우야담(於于野談)ꡕ에 의하면 이지함은 항상 베옷과 짚신에 삿갓을 쓰고 다녔으며, 사대부들에게 태도와 말씨가 방약무도하였다. 각종 술법(術法)에도 통하여 작은 배 네 모서리에 큰 바가지를 달고 제주도를 세번씩 내왕하여도 무사하였다. 서민들을 위하여 맨손으로 시작한 장사가 불과 몇년 만에 수만섬의 양곡으로 되자 이를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심은 박을 쪼개어 양곡을 여기에 담아 마포까지 운반하여 이 곳에 흙으로 높이 100척이나 되는 움집을 만들어 토정(土亭)이라 하고 양곡을 저장함은 물론 여기에서 거처하였다는 것이다.




104) 새남터(沙南基)




용산구 이촌동 199번지 1호 부근은 조선시대 연무장(鍊武場)이자 죄인의 처형장으로 쓰인 새남터였다. 새남터란 조선시대 무녀(巫女)들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죽은 사람의 혼령을 천도시키기 위하여 ‘지노귀새남’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한강 제방이 축조되기 전의 이 곳은 광대한 모래사장으로 조선시대에는 역모를 저지른  국사범 등 중죄인을 무교동 군기시 앞에서, 그리고 일반 죄인은 서소문 밖과 이 곳에서 각각 죄인을 공개로 처형하였다. 조선 말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周文謨)를 이곳에서 처형한 후 주로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지(殉敎地)가 되었다.

즉 1839년 기해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선교사, 1846년 병오박해 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 황해를 넘나들던 현석문(玄錫文)과 천주교 신자들, 1866년 병인박해 때 5명의 서양인 신부들과 많은 한국인 신자들이 이 곳에서 처형되었다.

이에 1950년 한국천주교에서 새남터 지역 일부를 매입하여 순교기념지로 지정하고, 1956년에 「카돌릭 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을 세웠으며 1984년에는 새남터순교기념대성전을 건립하였다.




105) 관수교 터(觀水橋址)




관수교는 종로구 관수동 91번지와 중구 입정동 211번지 사이의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로 1957년~1961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로 사라졌다. 관수교라는 이름은 이 일대를 청계천의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관수동이라 하였으므로 이 동명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이 다리는 융희 4년(1910)에 수표교(水標橋)와 하랑교(河浪橋) 사이에 가설한 것으로 그 규모가 장려(壯麗)하여 당시 도성 내의 교량 중의 제일이라고 하였다. 이 다리는 대한제국 말기 융희황제가 집무하던 창덕궁과 남산 밑에 위치한 조선통감부와의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였으므로 빈번한 두 나라 요인들의 왕래를 위하여 가설한 것이다.




106) 손병희선생댁(孫秉熙先生家)




종로구 가회동 170-12번지에는 일제 때 독립운동가인 의암(義菴) 손병희(1861~1922)선생의 자택이 있었다.

손병희선생은 12세인 고종 19년(1882)에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북접통령(北接統領)이 되어 동학군을 이끌었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한 후 함경도·평안도로 피신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897년부터는 동학의 실질적인 제3교주로서 동학 재건에 주력하고 190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미국으로 가려다 실패하고, 이용구의 친일화한 일진회 활동을 알고는 1906년에 귀국하여 동학의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내세워 천도교(天道敎)로 고쳤다.

손병희선생은 망명 중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보성·동덕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벌이고 인쇄소 보성사를 만들었다. 1919년 1월 독립운동의 이념을 정하고 2월 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게 한 뒤 3·1운동 전날 33인의 민족대표 중 23명이 손병희선생댁에서 모여 거사·절차 등을 협의하고 재확인하였다.

손병희선생은 33인 민족대표로 3·1운동 직후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8개월간 복역 중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창신동 195번지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였다. 손병희선생의 묘소는 천도교 신앙수련을 위해 지은 봉황각 부근의 도봉구 우이동 산 28-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107) 독립운동 유적지 --보성사 터(普成社址)




종로구 수송동 44번지에는 일제 때 천도교에서 경영한 인쇄소로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던 보성사가 있었다.

1910년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 관계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ꡔ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ꡕ를 간행하였다. 그 해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함에 따라 이 학교에 속해 있던 보성사 인쇄소에 창신사를 병합하였다. 당시 보성사는 천도교 교회서적과 학교 교과서 인쇄 외에도 한국출판문화 향상에 이바지 하여 광문회의 신문관(新文館)과 함께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앞서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어오자 2월 27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2만 1,000매를 인쇄하였다. 그런데 독립선언서 인쇄시와 이를 이종일 사장 집으로 옮기는 도중에 일본 경찰에 적발될 뻔 하였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모면하여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108) 독립운동 유적지 --세브란스병원




중구 남대문로 5가 84-11번지 연세빌딩은 조선 말 1908년에 세브란스의학교와 병원이 위치했던 곳으로 1919년 3·1독립운동을 위하여 기독교 지도자들과 학생측 대표들이 모여서 준비하던 곳이다.

세브란스병원은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의학교육기관으로 조선 말 1885년 4월에 미국 선교사 알렌(Allen,H.N.)이 국가의 지원으로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한 것에서 비롯되어 그 뒤 제중원(濟衆院)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나 1894년부터 선교부에서 운영을 맡았다. 1899년 제중원 의학교를 세우고 1903년 간호원 양성소를 설치하였으며,1899년 미국의 세브란스(Severance,L.H.)로부터 기증 받은 기금으로 1904년 의학교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09년 7월에 세브란스의학교로 개칭하고 1917년 5월 세브란스연합이학전문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학생대표 이용설(李容卨)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 위기에까지 놓여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바뀌었으나 광복 후 본래의 명칭을 되찾았고 1947년에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57년 1월에 연희대학교와 합병되었다.




109) 독립운동 유적지 --보신각(普信閣) 앞




종로 보신각 앞은 3·1독립만세 시위의 중심지로 3월 1일부터 계속 일어난 만세 시위는 거의 모두 이 곳이 중심이 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보신각종을 타종하였으며, 2차 대규모 시위인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대열로 나누어졌던 모든 시위대는 정오경에 이 곳에 집결하여 일본 군경과 충돌하면서 독립연설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4월 23일 이 곳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선포하였다.




110) 독립운동 유적지 --승동교회




종로구 인사동 137번지에 위치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승동교회는 1919년 3·1독립운동 때 탑골공원에 가까이 있었으므로 거사를 위해 학생들 대표들이 모여 준비하던 곳이다.

이 교회는 189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무어(Moore,S.F.)와 16명의 교인으로 시작하였다. 이 당시 교회가 승동(勝洞)에 있었으므로 교회 명칭이 붙여졌고, 백정들이 많이 출석하게 되어 한때 백정교회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1905년 8월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항일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즉 1919년 2월 20일 김원벽(金元壁)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모여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가 이 곳에서 열렸으며, 거사 직전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500매가 학생대표들에게 배포되는 등 독립만세운동의 본거지 중의 하나로 구실하였다.

1939년 일제에 의해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폐교되자 이 교회에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최초의 신학교를 출발시킴으로써 후일 한국신학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111) 독립운동 유적지 --마포전차종점




마포구 마포동 140번지, 다보빌딩 앞 일대는 전차(電車) 종점으로 3·1운동 때 시위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던 곳이다.

1919년 3월 1일 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시위군중 중의 일부는 이곳에 와서 오후 8시경까지 2,000 여명이 운집하여 시위하였으며 130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12) 독립운동 유적지 --유심사(惟心社)




종로구 계동에 위치했던 유심사는 1918년 9월에 창간된 불교 수양잡지 출판사로 1919년 3·1운동을 앞둔 2월 28일, 한용운선생이 중앙학교 학생 200여명을 이 곳에 모이게 하여 독립선언과 거사 준비 경위 등을 설명하고 불교 청년의 역량, 발휘를 강조하면서 독립정신을 심어 주었다.

ꡔ유심ꡕ은 3·1운동 민족대표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창간하였다가 1918년 12월 제3호까지 나온 불교 잡지로 집필진은 대부분 불교도인 한용운·최 린·최남선·백용성·현상윤 등이었다. ꡔ유심ꡕ 잡지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전의 문학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이룩한 잡지로 평가된다.




113) 독립운동 유적지 --종로 YMCA




종로구 종로 2가에 위치한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일명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회관은 1919년 3·1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기독교계 대표들이 모임을 가졌던 곳이다.

독립협회의 해산 이후 언더우드·아펜젤러 등 미국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가 발족되었다. 1913년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개칭되고 1918년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 YMCA가 조직되었다. YMCA는 이상재·윤치호 등의 지도자들이 감옥에서 석방된 후 대거 가입함으로써 독립협회 운동의 후계자 역할을 하였다.

조선 말 1904년에 현재 자리에 대지를 마련하여 가건물을 짓고 사회교육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독지가의 도움으로 1908년에 3층 현대식 건물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날조된 105인사건과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사건으로 윤치호·이승훈 등이 투옥되고, 이승만·김규식은 해외로 망명함으로 활동에 타격을 입었다.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인 YMCA 간부들은 2·8독립선언을 하고, 박희도·오기선 등 학생부 지도자들과 이상재·오화영 YMCA 원로급 지도자들은 천도교 지도자들과 밀회를 거듭하여 3·1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3·1운동으로 YMCA의 많은 회원들은 희생을 치르고 일제 말기에는 전국의 모든 YMCA는 폐쇄되고 오직 서울YMCA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가 광복 후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서울 YMCA회관이 소실되는 등 활동에 큰 타격을 받았으나 1967년 회관이 신축되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114) 독립운동 유적지 --중앙학림(中央學林)




현재 종로구 명륜동 1가 5-1번지, 서울과학고등학교 서쪽에는 불교계의 학교인 중앙학림이 있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민족대표 불교계의 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이 거사를 일으키기 에 앞서 이 곳의 중앙학림 학생들과 전국 불교인들의 독립운동 계획을 협의하였다.




115) 수진측량학교 터(壽進測量學校址)




수진측량학교는 현재 종로구청 동쪽, 종로구 수송동 53번지 일대에 1908년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세운 측량전문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초기에는 명칭이 없었으며 유길준이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가서 11년간 고초를 겪고 귀국한 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측량학교를 세우기로 하여 학교 터로 수진궁(壽進宮)을 빌린 것이다. 원래 수진궁은 조선 초 예종의 차남 제안대군의 사저(私邸)였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봉작(封爵)을 받기 전에 어려서 죽은 왕자·옹주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우(祀宇)로 되었다. 1907년에 수진궁의 제사는 폐지되었고, 아동 교과서와 교사를 양성하는 흥사단에서 사용하였으나 1906년 황실의 지원으로 세운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숙명여고의 前身)의 학교 부지 일부로 되었다. 따라서 수진측량학교 터는 현재 석탄회관빌딩·재보험빌딩·거양빌딩이 자리한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16) 노인정 터(老人亭址)




중구 필동 2가 134-2번지 남산 북쪽 기슭의 국립극장과 동국대학교 사이에는 조선 말 헌종의 장인 풍은부원군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이 세운 노인정이 있었다.

이 노인정은 1840년 경 풍양 조씨(豊壤趙氏)의 중심인물인 조만영이 남산의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계곡에 세운 정자로 많은 노인이 항상 모여 지냈다. 노인정이란 명칭은 남쪽 하늘의 노인성(老人星)을 따서 지은 것으로 장수(長壽)를 뜻하였다. 이 정자 뒤쪽 바위 벽에 ‘조씨노기(趙氏老基)’라는 글자를 새겨 놓은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조선 말 고종 31년(1894) 5월 23일, 일제는 청일전쟁에 앞서 조선에서의 이권을 획득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을 촉발시키려는 속셈으로 조선 정부에 대하여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 해 7월 10일부터 7월 1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조선 대표 신정희(申正熙) 등 3명과 일본 대표 오오토리(大鳥圭介)공사가 노인정에 모여 회담하였으로 이를 ‘노인정회담’이라고 부른다.

이 당시 일본 대표는 5개 조항의 내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실시할 것을 협박하였다. 이 당시 5개 조항은 ① 중앙 및 지방제도를 개정하고 새로운 인물을 등용할 것 ② 재정을 정리하고 부원(富源)을 개발할 것 ③ 법률을 정돈하고 재판법을 개정할 것 ④ 민란을 진정시키고 안녕, 유지에 필요한 병제(兵制)를 설치할 것 ⑤ 교육제도를 확립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이 개혁안에 반발하자 일제는 7월 23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세우므로서 내정개혁안은 갑오개혁의 초안으로 성안되어 일제의 내정 간섭이 노골화 하였다.

이 정자는 일제 때까지 남아있어서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후 불교부인회에서 사용하였으나 훼손되었고, 당시의 사진 만이 남아있다.




117) 제천정 터(濟川亭址)




용산구 한남동 541번지 한강변 언덕에는 조선 초 국가에서 건립한 제천정이 있었다.

한강루, 한강정으로 불리던 이 정자는 조선 초 세조 2년(14560에 세워진 왕실의 별장이자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곳이었다. 정자가 세워진 이 곳의 경치가 뛰어났으므로 역대왕들은 한강변의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들르기도 하고, 정릉(靖陵; 중종의 능)을 참배하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하였다.

이 곳은 경도십영(京都十詠) 중의 하나로 ‘제천완월’(濟川翫月; 제천정에서의 달구경)로 꼽았던 만큼 조선 초에는 많은 시인들이 찾았다.

이 정자는 이 괄의 난 때 인조가 공주로 피신하기 위하여 밤에 도성을 나와 이 곳의 한강을 건너게 되자 국왕의 안전을 위해서 제천정의 불을 질러 그 불빛으로 강을 환히 비춰 무사히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천정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고, 정자 밑에는 한강의 수위(水位)를 측정하던 수표석(水標石)이 세워져 있었다.




118) 대동단본부 터(大同團本部址)




종로구 구기동 168번지에는 3·1운동 직후 1920년에 조직된 대규모 독립운동 비밀결사단체인 대동단본부가 있었다.

대동단은 김가진(金嘉鎭)을 고문으로 모시고 비밀리에 의친왕 이 강(李堈)공을 상해임시정부로 모셔가려다가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이 단체는 후일 상해에서 활동하였다.




119) 이동녕주석 주거지(李東寧主席家址)




종로구 봉익동 50번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주석을 지낸 연안(延安) 이동녕(1869~1940)선생이 거주하였다.

이동녕선생은 충남 천원에서 태어나 16세 때 일가가 상경함으로 봉익동에 정착하였다. 1892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만민공동회에서 정부를 탄핵하여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03년 이상재 등과 YMCA운동을 전개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들과 덕수궁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며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2개월간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1906년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의숙을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이동녕선생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3·1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나자 상해에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초대 의장이 되어 4월 13일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그 후 이승만대통령이 장기간 궐석하자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고, 1927년·1930년·1935년·1939년에 각각 4번이나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29년 김 구(金九)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이사장, 1937년 이시영 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그 대표가 되었다. 이동녕선생은 1940년 중국 사천성(四川省) 기강(綦江)의 이국 땅에서 운명하자 광복 후 1948년 유해를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120) 정미의병 발원 터(丁未義兵 發源址)




현재 중구 서소문동 58번지 17호의 명지빌딩이 세워진 곳은 대한제국 때 시위병영(侍衛兵營)이 자리하였다. 그런데 1907년 정미 7조약에 따라 군대 해산령이 내림에 따라 분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원래 이 시위병영 자리는 조선시대 3백년간 선무사(宣武祠)가 있었던 곳이다. 선무사는 1958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병부상서 형개(邢玠), 1604년에는 정유재란 때 큰 전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를 모시고 매년 두차례씩 제사를 지낸 사당이다. 이처럼 생존한 형개와 양호에게 제사를 지내자 사람들은 생사당(生祠堂)이라고 불렀다. 선무사의 제사는 1903년에 폐지되고 6년 후에는 선무사의 건물도 헐렸다.

그러자 이 자리에는 광무황제가 거처하는 덕수궁의 호위를 맡은 시위보병 제 1연대 제 1대대가 주둔하였다. 1907년 7월 31일, 일제(日帝)는 정미7조약에 따라 정부와 융희황제에게 강요하여 군대해산령을 내리도록 했다.

박성환(朴性煥) 제1대대장은 훈련원에서 군대해산식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병을 칭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이 때 교관으로 와 있던 일본 대위가 제 1대대를 정렬시켜 훈련원으로 인솔하려고 하자, 박성환 대대장은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대한제국만세」를 크게 외친 다음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자 장병들은 박성환 대대장의 죽음에 호응하여 분연히 궐기했다. 이 때 일본인 교관들이 도망치자, 장병들은 탄약고를 깨트려 무장한 다음 영문 밖으로 진출하자 인근 부대의 한국군도 이에 호응하였다. 이들은 남대문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여 일본군 4명, 31명을 부상시켰다. 그러나 기관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는 적수가 되지 못하여 한국군 200여명이 사상하고 500여명이 포로되었다.

서울시위대의 항일전투 소식이 전해지자 각 지방에서도 해산군인들의 봉기가 잇달았다. 이후 해산군인들은 각자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항일전의 주축이 되었다.




121)  양재역 터(良才驛址)




  전일 지하철 3호선의 종착역인 양재역이 있는 부근을 흔히 말죽거리(馬粥巨里)라고 부르는데 조선 초부터 말죽거리에는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었다.

  이곳은 서울에서 충청도, 경상도로 가려면 한남동 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 대로를 따라 걸으면 첫 길목이 말죽거리여서 조선시대에는 사상(私商)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던 지역 중의 하나였다.

  말죽거리라는 이름은 조선초부터 양재역(良才驛)이 있었고 근처에는 주막도 적지 않아 먼길을 걸어 입경하려는 여행자들은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저녁을 먹은 뒤 이 곳에 묵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을 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말 위에서 팥죽을 들고 갔기 때문에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남아있다.

  이곳에 있던 양재역은 서울 이남의 경기도 전체 역을 통할하는 곳으로 종6품의 찰방(察訪)이 배치되어 있던 주요한 역이었다. 찰방 아래에는 역장(驛長), 역리(驛吏), 역졸(驛卒)이 있어서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직접 중앙에 보고했다.

한편 조선 초에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그의 모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국권을 좌우하였다. 명종 2년(1547) 9월, 부제학 정언각이 어느날 그의 딸을 전라도에 전송하기 위해 양재역까지 갔는데, 붉은 글씨로 「위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芑)등이 권력을 농락하여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글이 벽에 써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이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때 이기, 정명순 등이 “이것은 지난번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봉성군(鳳城君) 등을 처형하고 이언적(李彦迪) 등 20여명을 유배시켰다. 이로써 선비들이 다시 화를 입어 이를 정미사화라고 하고, 일명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의 옥(獄)」이라고 부른다.




122) 연서역 터(延曙驛址)




  은평구 대조동 49번지 일대는 조선시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던 연서역이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못했던 옛날에는 역원제도(驛院制度)를 운용하여 중앙과 각 지방의 연락을 취했다. 이 역원제를 통하여 공문이 전달되고 공용물자가 수송되었으며, 변방의 군대동향, 민심이 파악되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려면 관원들이 왕래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는데 이들에게는 출장비 대신 마필과 숙식이 제공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앞부터 30리 지점되는 도로변에 역(驛)과 원(院)을 설치했는데, 지방의 경우에는 역과 원을 같은 장소에 두었지만 서울에는 그렇지 않았다.

  관동, 관서, 관북 지방으로 가는 사람은 첫번째 역인 노원역에서 말을 제공받았다. 물론 이 역마(驛馬)를 빌리려면 「마패(馬牌)」라는 증명이 있어야 했다. 이 마패에는 사용자의 직위에 따라 말의 수효가 구리로 만든 둥근패에 그려져 있었다.

  관서지방으로 가려면 현재 은평구의 「연신내」로 호칭되는 곳에 있던 연서역을 거쳐 고양, 벽제, 파주로 빠질 수 있었다. 또 관동지방으로 가려면 망우리고개를 넘어 봉안, 양평, 지평, 원주로 갈 수 있었고, 또는 평구(平丘)에서 가평, 춘천으로 갈 수 있었다.







123) 칠패시장 터(七牌市場址)




서울 남대문 밖, 중구 봉래동 1가 48번지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난전(亂廛)시장의 하나인 칠패시장이 있었다.

이 시장은 종루·배오개(梨峴)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손꼽았는데 설치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이미 18세기 전반에 큰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장에서는 시전(市廛)과 마찬가지로 미곡·포목·어물 등을 비롯한 각종 물품이 매매되었는데, 그 중에서 어물전(魚物廛)이 유명하였다.

칠패시장이란 이름은 현종 11년(1670)부터 3군문(三軍門)에서 한성부의 순찰을 위해서 전 지역을 8패(牌)로 나누어 3일에 한 번씩 교대로 순찰한데에서 비롯되었다.

칠패의 시장상인들은 직접 지방에 가서 어물을 구해 오거나, 서울로 들어오는 어물을 길목에서 매점하는 방법으로 어물을 확보하여 시전 어물전의 어물 공급에의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즉 칠패의 어물 상인들은 금난전권(禁亂廛權)의 영향을 받지 않는 서울 주변의 상인들과 결탁하여 어물을 구입하고 판매하였다.




124) 사충서원 터(四忠書院址)




전일 노량진동사무소가 있던 동작구 노량진동 156번지 사육신묘 입구 동산에는 조선 후기 영조 원년(1725), 네 충신을 위해 건립된 사충서원이 있었다.

서원(書院)은 훌륭한 유학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서 유학을 공부하던 곳으로 사충서원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죽은 노론의 네 정승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이이명(李頤命) 등을 모셔 놓고 배향하였다.

신임사화는 경종 원년(1721) 신축년과 그 이듬해 임인년에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이 노론을 역모(逆謀)로 몰아 실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즉 당시 경종이 후사가 없고 허약하자 노론이 세제(世弟; 후일 영조)의 책봉과 대리청정을 실현시키자 반대파인 소론이 노론의 네 정승을 국왕의 병을 조작하여 발설하였다고 유배시킨 후 그 이듬해 목호룡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사약을 내린 것이다. 영조가 즉위하자 이들의 죄를 사면하고 서원을 세우게 하였다.

이 서원은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남아있다가 일제 때인 1927년에 철도공사로 이 서원 건물은 용산구 보광동 28번지로 이전하였으나 철폐되었고, 신축사화의 내력을 새긴 묘정비(廟庭碑)만 세워져 있다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로 옮겨졌다.




125) 국사당 터(國祠堂址)




남산의 정상, 팔각정 자리에 있었던 국사당은 조선 초에 남산 산신(山神)을 모시고 제사를 받들던 사당이었다.

국사당은 조선 초 태조 4년(1395) 12월, 한양 천도 후에 남산 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작하고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세워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일명 목멱신사를 국사당이라 하였는데 일제 때인 1925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강제로 철거되어, 그 일부 건물이 현재 종로구 무악동 산 2-12번지로 이전되었다.

국사당은 옛 문헌에 보면 봄, 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고 무학(無學)대사의 화상(畵像)을 모셔 놓았다고 하였다. 현재 국사당에는 태조 이성계, 강씨부인, 용왕, 무학대사, 최영장군 등 28개의 신상(神像)을 모시고 무당들이 당굿을 행하는데 이는 조선 초의 목멱신을 제사하던 것과는 많은 변화가 있다.




126) 평창 터(平倉址)




현재 종로구 평창동 330번지에는 조선 후기의 5군영의 하나로 서울 북쪽의 방어를 위한 총융청의 군량 창고가 있었다.

총융청은 인조 1년(1623) 만주에서 강성해진 후금(後金)과의 관계에 대비하여 수도 외곽의 방비를 담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설치된 중앙 군영(軍營)이다. 수어청과 함께 경기 일원의 방어를 담당하고, 다시 인조 22년(1644)에 겨울 3개월 동안 도성에 들어와 궁성의 숙위 임무를 하게되었다. 영조 33년(1757)에는 북한산성을 수비하던 경리청(經理廳)을 이관받아 수도의 외곽 방어를 담당하였는데 조선 말 고종 21년(1884)에 폐지되었다.

한편 평창동 156번지에는 조선 후기에 대동미(大同米)를 취급하던 선혜청(宣惠廳)의 창고인 평창이 있었다. 이 평창은 상하 두 개의 창고에 부평, 인천 등의 11개 읍으로부터 대동미를 받아 보관하고 있었다.




127) 남산사 터(南山寺址)




중구 필동 3가 79번지 남산 기슭에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남산사가 있었다.

남산사는 널리 알려진 절로서 현재 서울 시내에 남아있는 극소수의 절 터이다. 남산사는 어느 때인가 훼손되었는데 일제 때인 1936년에 각념선사(覺念禪師)가 이 절 터 위에 각심사(覺心寺)를 지었다. 현재 이 절이 있었던 곳에는 큰 규모의 금당 터(金堂址), 법당 터(法堂址)와 석조계단과 석조기단, 주춧돌 터, 문 터, 지대석(地臺石) 등이 남아있다.


128) 우산각 터(雨山閣址)




종로구 숭인동 5번지, 청룡사 남쪽 부근에는 조선 초 세종 때 유 관(柳寬)정승이 살았던 오두막집 우산각이 있어서 우산각골이라고 하였다.

유 관은 조선 초 태조 때부터 세종 때까지 4대 35년간 정승을 지냈는데 울타리도 없는  서너칸 오두막집에서 살았으므로 비만 오면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졌지만 우산이 없는 백성들을 걱정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선조 때 판서를 지낸 이희검(李希儉)이 이 우산각에서 청빈하게 살았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친지들이 추렴을 해서 장사를 치렀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이 집터는 이희검의 아들 지봉 이수광(李睟光)에 의해서 복원하여 우산을 펴고 비를 근근히 가렸다는 뜻의 비우당(庇雨堂)이란 당호(堂號)를 지어 달았다.




129) 자주동 샘(紫芝洞泉)




낙산(酪山) 줄기 원각사 옆 종로구 창신(3)동 9번지에는 옷감이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는 샘물인 자주동 샘(紫芝洞泉)이 있어서 이 일대를 자줏골,자주동이라고 불렀다.

조선 초 단종비 송씨(宋氏; 정순왕후))가 영월로 귀양간 단종을 애절하게 기다리며 정업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명주를 짜서 댕기, 저고리깃, 옷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청룡사에서 300 여m 떨어진 화강암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명주를 빨았더니 자주색물이 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자줏물이 든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에는 「紫芝洞泉」이라고 새겨져 있고, 자주바위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인근에는 청룡사, 동망봉 등 단종애사에 얽힌 명소가 산재해 있다. 자지(紫芝)란 자줏빛을 띄는 풀이름을 말한다.




130) 김 구주석(金九主席) 서거한 곳




종로구 평동 108번지 고려병원 본관으로 사용하는 경교장(京橋莊) 2층 건물은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인 김 구선생(1876~1949)이 광복 직후에 거처하다가 피격 당해 서거한 곳이다.

이 건물은 김 구선생이 광복후 3개월이 지난 11월 23일 오랜 망명 생활끝에 귀국하여 3년 7개월간 거처한 곳이다.

김 구선생은 동학(東學)에 가입하여 3남 지방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황해도에서 거사하였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피신하여 의병에 가담하였다. 국권을 빼앗긴 1년 뒤 일제가 조작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김구선생은 15년 형을 언도 받아 복역 중에 감형으로 출옥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김 구선생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을 거쳐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김 구선생은 무장 항일운동을 지휘하였고, 1933년 남경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무관학교 설치와 독립운동 자금지원에 대해서 협의했으며, 1939년 임시정부를 중경(中慶)으로 옮기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조직하였다. 1945년 2월, 대한민국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을 특수훈련을 시켜 본국에 침투하려는 작전을 세우다가 광복을 맞았다.

김 구선생은 상해에서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이끌고 개인자격으로 비행기를 타고 환영객 없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27년 만에 조국의 땅을 밟게 된 김 구선생은 죽첨장(竹添莊)에 숙소를 정하고 1945년 11월에 숙소 이름을 경교장으로 바꾸었다. 경교(京橋)란 무악재에서부터 한강으로 흐르는 만초천(일명 旭川)이 이 건물 옆을 흘러 새문안길을 가로 지르므로 여기에 놓여진 다리 이름이다. 이 죽첨장 건물은 1936년 8월에 당시 금광을 경영하여 거부(巨富)가 된 최창학이 짓기 시작하여 2년 만에 완공한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이날 새벽 김구선생은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김 구선생은 3년 7개월간 경교장에서 머무는 동안 한국의 독립과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귀국하자마자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한 신탁통치 실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또한 한반도의 분단을 막기 위해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시도하여 북한을 다녀 오기도 했다.




131) 이봉창(李奉昌)의사 생가 터




용산구 효창동 118-1번지에는 1932년 일본 동경에서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를 폭살하려다가 실패한 독립운동가 이봉창의사(1900~1932)가 살았다.

이봉창의사는 형과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 등으로 생계를 영위하다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맹세하고 1931년 중국 상해에 건너가 한국인거류민단에 가서 독립운동에 허신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김 구선생이 그의 진의를 파악하고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키고 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겨우 거사자금을 마련하고 수류탄을 입수하게되어 1931년 12월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이봉창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본 국왕 히로히도가 만주국 부의(溥儀)황제와 함께 동경 요요키(代代木)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궁궐로 돌아가는 것을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명중시키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이봉창의사는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32) 나석주(羅錫疇)의사 의거기념 터




중구 을지로 2가 181번지, 외환은행 본점 자리는 일제가 조선의 경제 착취를 위해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가 있었던 곳으로 1926년에 이를 폭파하고자 독립운동가 나석주의사(1892~1926)가 투탄(投彈)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나석주의사는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1910년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자 23세에 만주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황해도에서 비밀항일결사를 조직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1926년 의열단(義熱團)에 입단하였다.

그는 조선 경제침략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위시하여 조선은행·조선식산은행을 폭파, 파괴하여 응징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말을 듣고 이에 대한 거사계획을 세웠다. 1926년 12월 26일, 인천으로 잠입하여 서울로 들어와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어 실패하였다. 그 길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들어가 권총으로 일본인 직원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폭탄 1개를 투탄하였으나 불발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자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소지하던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33) 민영환집 터(閔泳煥家址)

종로구 견지동 27-2번지, 조계사 경내로 편입된 곳에는 을사조약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선생(1861~1905)이 거주하였다.

여흥 민씨 중의 영(泳)자 항렬의 여덟사람, 즉 ‘8영(八泳)’의 한 사람인 민영환(閔泳煥)은 고종 15년(1878)에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 성균관대사성에 재임 중 임오군란으로 부친 민겸호가 구식군인에게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이어서 병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고종 30년(1893) 11월 23일에 한성판윤으로 임명되어 1주일간 재임하였다.

민영환선생은 1895년 주미전권공사, 이듬해 특명전권대사로 러시아, 1897년 영국 등 6개국 특명대사로 해외 출장을 다녀온 결과 신문물에 눈을 뜨게되어 정부에 개혁을 주장하고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던 민씨 일족 중 유일한 개화파여서 민씨일파의 미움을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백관을 인솔, 궁궐 앞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민영환은 국가의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알고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 전동(典洞; 공평동 2번지)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국민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가 순국할 때 큰 별이 서쪽 하늘에서 떨어지고 까치가 떼를 지어와서 울었다고 한다.

민영환선생이 순국한 후에 피 묻은 옷과 칼을 상청(喪廳) 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바닥과 피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血竹)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절죽(節竹)이라고 하였다.

민영환선생의 자결소식이 전해지자 조병세를 비롯하여 많은 인사들이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134) 서강나루 터(西江津址)




마포구 신정동 한강변 서강대교 북쪽 부근에는 서강나루가 있었다.

이 일대는 강물이 잔잔하여 조선시대에는 서호(西湖)라고 불렀는데 나루로서 보다는 서해안에서 세곡(稅穀)을 싣고 올라 온 조운선(漕運船)의 선착장이었다. 그리하여 이 곳에는 세곡을 보관하기 위하여 광흥창(廣興倉)과 풍저창(豊儲倉)이 설치되어 있어서 조선 초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서강조박(西江漕泊)’이라고 하였다.

서강은 주변의 경관도 뛰어나서 강변에 정자가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이 곳을 찾아 경승(景勝)을 즐기기도 하고 낚시와 뱃놀이를 즐기려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조선 초부터 민간선과 관선·군함을 관리하던 전함사(典艦司)를 설치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병인양요 때인 1866년 8월 18일에는 프랑스군함 2척이 이 나루터 부근까지 침입하자 흥선대원군은 양화진에 많은 선박을 가라앉혀 한강의 수로(水路)를 폐쇄하기도 하였다.




135) 이수정 터(二水亭址)

현재 강서구 염창동 103번지, 안양천이 감돌아가는 두미암(斗尾岩) 위에는 조선 중기에 세운 이수정이 있었다.

원래 이 자리는 조선 초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이 세운 임정(林亭)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 중기 한흥군(韓興君) 이덕연(李德演; 1555~1636)과 충숙공(忠肅公) 이덕형(李德泂; 1566~1645)형제가 정자를 다시 세우고 이수정으로 칭하였다. 이들은 노후에 관직에서 물러나 기거하며 이산해, 이덕향 등 조선 명신과 명나라 사신 주지등이 이 정자를 보고 읊은 시가 전한다. 이수정은 개항 후에 훼손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영조 16년(1740)에 겸재 정 선(鄭敾)이 양천현령으로 부임하여 이 정자를 그린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곳에는 마을 주민의 치성단이 있어 도당산으로 불려진다.




136) 관립 교동소학교(官立校洞小學校)

종로구 경운동 18번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국민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개항 후 물밀듯 밀려오는 서양문물을 교육 시키기 위해 지금부터 101년 전인 1894년 9월 18일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신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교육 조서(詔書)보다 5개월, 소학교령(小學校令)이 선포된 때보다 10개월 먼저 설립된 셈이다.

개교 당시에는 황실학교(皇室學校)로 불리었는데 소학교령에 따라 한성사범부속학교로 바뀌고 1906년에는 교동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개교 당시에는 학생 대부분이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입학하였기 때문에 8~15세의 연령이었고, 결혼을 한 학생은 갓을 쓰고 산술·지리·역사·영어 등의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이 학교는 1세기 동안 전대통령 윤보선·작곡가 윤극영·아동문학가 윤석중·전서울시장 윤치영 등의 인물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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