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 (金瑪利亞) -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임시의정원 의원, 근화회 회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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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임시의정원 의원, 근화회 회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 독립운동가.

 

 

본관은 광산(光山).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 아버지는 김윤방(金允邦), 어머니는 김몽은(金蒙恩)이다. 아버지는 한학자로, 서상륜(徐相崙)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1895년 아버지가 세운 소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4년 만에 졸업하고, 집에서 여공(女功: 길쌈 등 여자들의 일)을 수업하며 한문공부에 열중하였다. 1895년에 아버지를, 1904년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대학공부까지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노백린(盧伯麟)·김규식(金奎植)·유동열(柳東悅)·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은 삼촌 김필순(金弼淳)의 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0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했다가 교파 관계(敎派關係)로 곧 연동여학교(延東女學校: 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로 전학, 1910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3년 동안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를 지냈고,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한 뒤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긴조여학교[錦城女學校]와 히로시마여학교에서 1년간 일어와 영어를 수학한 뒤, 1915년 동경여자학원 대학예비과에 입학하였다. 1918년 말경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 황에스터[黃愛施德] 등과 구국동지가 되었다.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를 세운 뒤 스스로 졸업을 포기하고,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베껴 변장한 일본 옷띠인 오비 속에 숨기고 차경신(車敬信) 등과 2월 15일 부산으로 들어왔다.

귀국 후 대구·광주·서울·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여성계에서도 조직적 궐기를 서둘러야 한다며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하였다. 황해도 봉산에서의 활약을 마치고 3월 5일 서울 모교를 찾아갔다가 일본 형사에게 붙잡혔다. 이 때 모진 고문으로 상악골축농증에 걸려 평생을 고생하였다.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그 해 8월 5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항일운동을 북돋우고자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하여, 그 해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절대 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에 있어 중요한 임무를 맡기 위한 준비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힘을 쏟던 중 그 해 11월 말 애국부인회 관계자들과 다시 붙잡혔다. 김마리아는 심문을 받으면서 “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연호는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정신을 보였다.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서울 성북동 보문암(普門庵)에서 요양하다 변장으로 인천을 탈출,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도 상해애국부인회(上海愛國婦人會)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수학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6월 미국으로 가 1924년 9월 파크대학 문학부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8년에는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 석사학위를 받고, 1930년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한편, 이곳에서 황에스터·박인덕(朴仁德) 등 8명의 옛 동지들을 만나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으로 추대된 뒤 재미 한국인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 국가에 널리 알렸다.

그 뒤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신학교에서 신학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1935년 귀국, 이후 여생을 기독교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순국하였는데, 김마리아의 유언에 따라 시체는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렸다.

2ㆍ8 독립 선언에 함께 참가했던 이광수가 쓴 〈누이야〉(1933년)라는 시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를 소재로 쓴 것이며, 안창호가 김마리아같은 여성이 열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나 고문을 하던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 등이 남아 있다. 그는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협력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사기에도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등 불굴의 의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자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SGI서울보증은 2019년 5월 24일 창립 50주년과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옛 정신여자고등학교가 자리했던 본사 부지(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29)에 흉상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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